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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blue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9월 18일 (화) 16:09 판 (조선후기 이상적인 양반가의 여성, 장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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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대보살, 성주산문을 열다

시놉시스

낭혜화상 무염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지만, 진골 귀족이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대에 육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무염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사상이 비루하다고 느꼈고, 마침내 설악산 오색석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선종을 배웠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도와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당 무종의 불교 탄압으로 신라로 귀국한 무염은 성주사를 건립하였고, 성주산문은 선문구산 중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하게 된다. 무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진성여왕이 탑비의 건립을 명하였다. 현재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무염의 탑비는 사산비명의 하나이다. 특히 성주산문의 승려들은 왕건의 고려 건국과 왕건 강화에 조력하였다.

핵심노드

  • 무염: 성주산문을 개창한 신라시대의 승려.

핵심관계

  • 성주산문 – ekc:founder -> 무염 : 설명설명


세종의 한글 창제와 그 시험작

시놉시스

조선 세종이 1443년 한글을 반포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집현전을 창립하여 많은 신진 학자들을 끌어모았다. 한글이 창제된 후에는 한자를 읽는 방식에 대한 표준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의 표준 음운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하여 '홍무정운역훈'을 만들었다. 이 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한자 표준 음운서인 '동국정운'을 편찬할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실의 건국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글 노랫말로 만들어 엮은 책으로, 조선 건국의 신성성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한글의 창제된 직후 편찬된 서적들은 한자의 표준발음 체계를 정립하고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서라는 한글 창제의 목적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핵심노드

  • 조선 세종 : 조선의 4번째 왕.
  • 훈민정음 : 조선 세종이 만든 우리말(한글).
  • 홍무정운역훈 : 중국의 한자 발음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한 책.
  • 동국정운 : 한자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지침서.
  • 용비어천가 : 조선 건국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한글과 한시로 기록하여 엮은 책.

핵심관계

  • 조선 세종 - dcterms:creator - 훈민정음
  • 훈민정음 - edm:isRelatedTo - 홍문정운역훈
  • 훈민정음 - edm:isRelatedTo - 용비어천가

조선후기 왕실의 일상 - 숙명공주에게 보낸 안부편지

시놉시스

숙명공주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딸이며, 조선 현종의 누나이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심익현에게 시집을 간 후 부모님, 동생을 비롯하여 할머니인 장렬왕후, 올케인 명성왕후(현종의 아내)와도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편지들을 한데 모아 숙명공주의 남편인 심익현가의 후손들이 '숙명신한첩'으로 엮어내었다. 아버지 효종이 아이를 잃은 숙명공주를 위로하고, 오라비인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귤을 보내는 내용까지, 숙명신한첩을 통해 조선 후기 왕실 인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핵심노드

  • 숙명신한첩 : 숙명공주가 왕실인물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은 책.
  • 숙명공주 : 효종의 딸이나 현종의 누나.

핵심관계

  • 숙명신한첩- dcterms:creator-> 숙명공주

술과의 전쟁 - 영조가 내린 세번의 금주령

시놉시스

조선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신료들에게 경계해야 할 것 세 가지로 붕당(朋黨), 사치, 술을 제시하였다. 1731년, 1757년, 1762년 총 세 차례에 걸쳐 금주령을 내린다. 첫 번째 내린 금주령을 적은 '계주문'에서는 술이 없을 수는 없다며, 술을 많이 빚지 말라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관리들이 잘 따르지 않자, 두번째 금주령을 적은 '어제계주윤음'을 지방의 관리에게 내린다. 이 때는 국가 제사에서도 술을 금지하고, 금주령을 어길 경우 10년의 형벌을 내린다고 선언한다. 더불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용이 잘 전달되도록 한글로 번역한다. 그러나.. 금주는 힘든 것인가 보다. 1762년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발생하자 금주령을 다시 반포하는데,이 때는 지난 번역 버전이 번역체 문장라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라 판단해, 처음부터 내용을 한글로 작성한다. 즉 영조의 금주령 전개과정은 (본인은 답답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한글이 한자의 보조적 문자에서 독자적인 문자로 인정받아 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ps.이렇게 쉽게 썼으면 좀 알아듣지?)

핵심노드

  • 조선 영조 : 조선의 21대 왕.
  • 어제계주윤음 : 1757년에 영조가 내린 금주령에 대한 내용이 담긴 문서.
  • 어제경민음 : 1762년에 영조가 내린 금주령에 대한 내용이 담긴 순한글 문서.
  • 금주령 : 술을 금지하는 명령(어명).

핵심관계

  • 조선 영조 -edm:isRelatedTo-> 어제계주윤음
  • 조선 영조 -edm:isRelatedTo-> 어제경민음
  • 어제계주윤음 -edm:isRelatedTo-> 금주령
  • 어제경민음 -edm:isRelatedTo-> 금주령

사명당 유정의 임진왜란 활약상

시놉시스

사명대사 유정은 그의 스승 서산대사 휴정과 함께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승려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유정은 유점사에 머물렀는데, 이 때 근처에 있는 아홉 고을의 백성을 구출하였다. 그 이후 서산대사 휴정과 합류하여 승병을 이끌었는데 평양성 전투와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유정의 활약은 군사적인 부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일본 왜성에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회담을 진행하는 등 외교적인 성과도 올렸다. 사명대사 유정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찰은 밀양 표충사로서, 그 사찰이름은 그의 국가에 대한 충절을 표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승려의 지위는 천민과 다를바가 없었다. 사명대사 유정의 활약은 조선시대에 승려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몇 안되는 사례다.

핵심노드

  • 유정: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조선시대 승려.
  • 휴정:유정의 스승.
  • 고산 유점사:유정이 머물렀던 사찰.
  • 평양성 전투: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 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 밀양 표충사:밀양에 있는 사찰로 사명대사 유정을 제향하고 있다.

핵심관계

  • 유정 – ekc:hasMaster -> 휴정 : 서산대사 휴정은 사명대사 유정의 스승이다.
  • 유정 - edm:isRelatedTo -> 고산 유점사 : 유정은 고산 유점사에 주석하였다.
  • 유정 - edm:isRelatedTo -> 4차 평양전투 : 유정은 4차 평양전투에 참가하였다.
  • 유정 - edm:isRelatedTo -> 가토 기요마사 :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였다.
  • 유정 - edm:isRelatedTo -> 밀양 표충사 : 유정은 밀양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안성 칠장사와 인물 설화

시놉시스

안성 칠장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다녀간 곳이다. 먼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라는 대사로 유명한 궁예는 이곳에서 13살 때까지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래서 칠장사 명부전에는 활을 쏘는 궁예 그림이 그려져있다. 홍명희 소설에 나오는 의적 임꺽정도 칠장사와 인연이 있다. 임꺽정은 칠장사에서 스승인 갖바치와 만나게 되었으며 이봉학 등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칠장사에 얽힌 가장 유명한 설화는 어사 박문수의 과거급제 이야기이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가기 전날 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문수야 안성에 칠장사라는 절이 나한전이 있다던데 거기서 기도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더라. 너도 이번에 급제하도록 올라가는 길에 꼭 빌고가거라." 이 말을 듣고 박문수는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나한전 부처님이 나와서 과거에 나올 시제 여덟 줄 중에 일곱 줄을 알려주고 나머지 한줄은 알아서 쓰라고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과거를 보러갔는데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알려준 일곱줄이 그대로 나와서 일곱줄은 쉽게 쓰고 나머지 한줄은 엄청난 고민 끝에 다썼는데, 그 마지막 줄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아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박문수의 전설 때문에 지금까지도 칠장사는 수능이나 국가고시 등에서 좋은 성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고있다.

핵심노드

  • 안성 칠장사: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있는 사찰로, 다양한 역사적 인물 설화들이 전해진다.
  • 정현:안성 칠장사를 중건한 승려.
  • 궁예:후고구려의 왕으로 자칭 미륵불. 자기가 관심법을 쓸 줄 안다고 착각. 무고한 사람 여럿 죽임. 어릴 때 칠장사에서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 박문수:조선 후기의 문신. 과거를 보러 가는길에 안성 칠장사에 들러서 하룻밤을 묵음.


핵심관계

  • 안성 칠장사 -ekc:renovator-> 정현 : 정현은 안성 칠장사를 중건했다.
  • 안성 칠장사 -edm:isRelatedTo-> 궁예 : 궁예는 어릴적 안성 칠장사에서 무예를 연마했다.
  • 안성 칠장사 -edm:isRelatedTo-> 박문수 : 박문수는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안성 칠장사에서 묵었다.

정조의 효심과 불교 -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시놉시스

조선 정조의 첫 아들인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고 한동안 자식이 없던 정조는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융건릉(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성으로 이전한 이듬해에 왕자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를 하늘의 은혜로 여기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절인 화성 용주사를 창건한다. 더불어 화성 용주사에서 부처가 부모의 은혜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그것을 그린 그림을 모아 '불설대부모은중경'를 편찬한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왕이 불교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것은 비판받기 쉬운 일이었으나, '불설대부모은중경'이 '효도'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유교의 '효' 관념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어 편찬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는 '불설대부모은중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효'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핵심노드

  • 조선 정조 : 조선의 22대 왕
  • 화성 용주사 :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
  •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 부모의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한글로 번역한 책.

핵심관계

  • 조선 정조 -edm:isRelatedTo-> 화성 용주사
  • 화성 용주사 -edm:isRelatedTo->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조선후기 양반가 아녀자의 고된 삶 - 한산이씨 고행록

시놉시스

한산이씨는 17살에 43살이었던 유명천의 셋째 부인으로 시집을 간다. 유명천은 총 세 번의 귀양을 가게 된다. 한산이씨는 유명천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두 딸 모두 생후 5개월만에 세상을 떠난다. 결국 시동생의 아들인 유매를 양자로 들이게 된다. 한편 유명천은 결혼한 지 30년이 되던 해, 세 번째 귀양에서 사망한다. 남편이 죽고 5년 뒤 첫 번째 며느리(양아들 유매의 부인)이 사망하자, 둘째 며느리를 들이나 곧 사망하고, 셋째 며느리도 얼마 안가 사망한다. 한산이씨는 셋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손자인 유경용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고, 60세가 되던 해에 이런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산이씨 고행록'이란 글로 남긴다.

핵심노드

  • 한산이씨 고행록 : 한산이씨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
  • 유명천 처 한산이씨 : 유명천의 아내이자 한산이씨 고행록의 작가.

핵심관계

  • 한산이씨 고행록 -dcterms:creator-> 유명천 처 한산이씨

조선후기 이상적인 양반가의 여성, 장계향

시놉시스

장계향은 이름 높은 학자인 장흥효의 딸이다.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10세에 소학을 깨우치고 13세에 시를 짓는 등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19세에 아버지의 제자인 이시명의 둘째부인으로 시집을 갔다. 이시명은 이미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1녀를 둔 상태였다. 그녀는 전처의 아들인 '상일'의 공부를 위해, 2km가량 떨어진 선생의 집으로 '상일'을 매일 같이 업고 다니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시명과의 사이에서 6남2녀를 두었으며, 그녀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 덕택에, 7명의 아들은 모두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되어 '안릉가 7용'으로 불렸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둘째 아들인 '이현일'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녀는 70세가 되었을 무렵에 자손들을 위해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음식과 술에 대한 조리법을 담은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이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요리책이자,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요리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핵심노드

  • 장계향 : 이시명의 아내이자 음식 디미방의 저자.

핵심관계

  • 음식디미방 -dcterms:creator-> 장계향.
  • 장계향 -ekc:hasSon-> 장계향.

조선 최초의 황비이자 숙명여대 설립자 - 순헌황귀비 엄씨

시놉시스

조선 최초의 황비인 순헌황귀비는 원래 명성황후의 보필하는 궁녀였다. 고종의 승은을 입고 궁궐에서 쫓겨났으나, 명성황후가 사망한 후 궁궐도 돌아왔다. 이후 영친왕 이은을 낳았으며, 여성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숙명여학교는 현재 숙명여자대학교로 발전하였다.)

핵심노드

  • 순헌황후 : 고종의 아내이자 조선 최초의 황비인 순헌황귀비 엄씨.
  • 책황귀비홀기 : 순헌황귀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하는 의례를 기록한 한글 문서.

핵심관계

  • 순헌황후 -edm:isRelatedTo-> 책황귀비홀기

독립선언서의 탄생비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29명의 민족대표가 조선의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앉았다. 탁상 위에 있는 독립선언서에는 33명의 서명이 적혀있었지만, 당일에는 4명이 결석을 한 터였다. 당초에 독립선언서는 선언서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 독립을 건의하는 건의서 형식으로 작성하기로 발의되었다. 하지만 최린은 독립 의지와 당위성을 강조하려면 선언서로 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그 뜻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독립선언서의 초안 작성은 최남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작 최남선은 민족대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인은 "학자로 일생을 마치고 싶다"며 독립운동 전면에는 나서고 싶지않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당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한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족대표끼리의 서로 자기 단체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계통으로 참여한 이승훈의 훈계로 연장자이자 주최자였던 손병희가 민족 대표의 첫번째로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비밀 유지를 위해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은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 그는 2월 27일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커튼을 치고 조용히 인쇄 작업을 시작했다. 한창 인쇄를 하는데, 운이 나쁘게도 주변을 순찰하던 종로경찰서의 형사 신승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검문을 하러 보성사로 들어왔다. 이종일은 신승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도 조선사람이니 제발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애걸한 후,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손병희는 안방에서 5천원 뭉치를 꺼내서 이종일에게 주었고, 신승희는 이돈 5천원을 꿀꺽하고 독립선언서 인쇄를 눈감아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인쇄된 독립선언서,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는 한용운이 이를 낭독하였고 낭독이 끝나자 민족대표 일동은 다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파고다 공원에서는 정재용이 학생과 시민 5천명을 앞에두고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시놉시스


핵심노드

  • 김성일

핵심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