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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blue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9월 17일 (월) 10:19 판 (조선후기 양반가 아녀자의 고된 삶 - 한산이씨 고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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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와 낭혜화상 무염

성주산문을 일으킨 낭혜화상 무염을 기리기 위해 성주사지에 탑비가 세워졌다.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고 최언위가 비문을 썼는데, .....

세종의 한글 창제와 그 시험작

조선 세종이 1443년 한글을 반포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집현전을 창립하여 많은 신진 학자들을 끌어모았다. 한글이 창제된 후에는 한자를 읽는 방식에 대한 표준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의 표준 음운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하여 '홍무정운역훈'을 만들었다. 이 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한자 표준 음운서인 '동국정운'을 편찬할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실의 건국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글 노랫말로 만들어 엮은 책으로, 조선 건국의 신성성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한글의 창제된 직후 편찬된 서적들은 한자의 표준발음 체계를 정립하고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서라는 한글 창제의 목적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조선후기 왕실의 일상 - 숙명공주에게 보낸 안부편지

숙명공주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딸이며, 조선 현종의 누나이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심익현에게 시집을 간 후 부모님, 동생을 비롯하여 할머니인 장렬왕후, 올케인 명성왕후(현종의 아내)와도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편지들을 한데 모아 숙명공주의 남편인 심익현가의 후손들이 '숙명신한첩'으로 엮어내었다. 아버지 효종이 아이를 잃은 숙명공주를 위로하고, 오라비인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귤을 보내는 내용까지, 숙명신한첩을 통해 조선 후기 왕실 인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술과의 전쟁 - 영조가 내린 세번의 금주령

조선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신료들에게 경계해야 할 것 세 가지로 붕당(朋黨), 사치, 술을 제시하였다. 1731년, 1757년, 1762년 총 세 차례에 걸쳐 금주령을 내린다. 첫 번째 내린 금주령을 적은 '계주문'에서는 술이 없을 수는 없다며, 술을 많이 빚지 말라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관리들이 잘 따르지 않자, 두번째 금주령을 적은 '어제계주윤음'을 지방의 관리에게 내린다. 이 때는 국가 제사에서도 술을 금지하고, 금주령을 어길 경우 10년의 형벌을 내린다고 선언한다. 더불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용이 잘 전달되도록 한글로 번역한다. 그러나.. 금주는 힘든 것인가 보다. 1762년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발생하자 금주령을 다시 반포하는데,이 때는 지난 번역 버전이 번역체 문장라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라 판단해, 처음부터 내용을 한글로 작성한다. 즉 영조의 금주령 전개과정은 (본인은 답답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한글이 한자의 보조적 문자에서 독자적인 문자로 인정받아 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ps.이렇게 쉽게 썼으면 좀 알아듣지?)

사명당 유정의 임진왜란 활약상

사명대사 유정은 그의 스승 서산대사 휴정과 함께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승려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유정은 유점사에 머물렀는데, 이 때 근처에 있는 아홉 고을의 백성을 구출하였다. 그 이후 서산대사 휴정과 합류하여 승병을 이끌었는데 평양성 전투와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유정의 활약은 군사적인 부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일본 왜성에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회담을 진행하는 등 외교적인 성과도 올렸다. 사명대사 유정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찰은 밀양 표충사로서, 그 사찰이름은 그의 국가에 대한 충절을 표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승려의 지위는 천민과 다를바가 없었다. 사명대사 유정의 활약은 조선시대에 승려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몇 안되는 사례다.

안성 칠장사와 인물 설화

안성 칠장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다녀간 곳이다. 먼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라는 대사로 유명한 궁예는 이곳에서 13살 때까지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래서 칠장사 명부전에는 활을 쏘는 궁예 그림이 그려져있다. 홍명희 소설에 나오는 의적 임꺽정도 칠장사와 인연이 있다. 임꺽정은 칠장사에서 스승인 갖바치와 만나게 되었으며 이봉학 등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칠장사에 얽힌 가장 유명한 설화는 어사 박문수의 과거급제 이야기이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가기 전날 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문수야 안성에 칠장사라는 절이 나한전이 있다던데 거기서 기도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더라. 너도 이번에 급제하도록 올라가는 길에 꼭 빌고가거라." 이 말을 듣고 박문수는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나한전 부처님이 나와서 과거에 나올 시제 여덟 줄 중에 일곱 줄을 알려주고 나머지 한줄은 알아서 쓰라고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과거를 보러갔는데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알려준 일곱줄이 그대로 나와서 일곱줄은 쉽게 쓰고 나머지 한줄은 엄청난 고민 끝에 다썼는데, 그 마지막 줄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아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박문수의 전설 때문에 지금까지도 칠장사는 수능이나 국가고시 등에서 좋은 성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고있다.

정조의 효심과 불교 - 불설대부모은중경언해

조선 정조의 첫 아들인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고 한동안 자식이 없던 정조는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융건릉(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성으로 이전한 이듬해에 왕자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를 하늘의 은혜로 여기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절인 화성 용주사를 창건한다. 더불어 화성 용주사에서 부처가 부모의 은혜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그것을 그린 그림을 모아 '불설대부모은중경'를 편찬한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왕이 불교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것은 비판받기 쉬운 일이었으나, '불설대부모은중경'이 '효도'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유교의 '효' 관념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어 편찬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는 '불설대부모은중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효'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양반가 아녀자의 고된 삶 - 한산이씨 고행록

한산이씨는 17살에 43살이었던 유명천의 셋째 부인으로 시집을 간다. 유명천은 총 세 번의 귀양을 가게 된다. 한산이씨는 유명천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두 딸 모두 생후 5개월만에 세상을 떠난다. 결국 시동생의 아들인 유매를 양자로 들이게 된다. 한편 유명천은 결혼한 지 30년이 되던 해, 세 번째 귀양에서 사망한다. 남편이 죽고 5년 뒤 첫 번째 며느리(양아들 유매의 부인)이 사망하자, 둘째 며느리를 들이나 곧 사망하고, 셋째 며느리도 얼마 안가 사망한다. 한산이씨는 셋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손자인 유경용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고, 60세가 되던 해에 이런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산이씨 고행록'이란 글로 남긴다.

조선후기 이상적인 양반가의 여성, 장계향

장계향은 이름 높은 학자인 장흥효의 딸이다.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10세에 소학을 깨우치고 13세에 시를 짓는 등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19세에 아버지의 제자인 이시명의 둘째부인으로 시집을 갔다. 이시명은 이미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1녀를 둔 상태였다. 그녀는 전처의 아들인 '상일'의 공부를 위해, 2km가량 떨어진 선생의 집으로 '상일'을 매일 같이 업고 다니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시명과의 사이에서 6남2녀를 두었으며, 그녀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 덕택에, 7명의 아들은 모두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되어 '안릉가 7용'으로 불렸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둘째 아들인 '이현일'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녀는 70세가 되었을 무렵에 자손들을 위해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음식과 술에 대한 조리법을 담은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이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요리책이자,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요리책으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