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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여주 흔암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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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6일 (일) 15:01 기준 최신판




설명

경기도 시도기념물 여주 흔암리 선사 유적.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 산2-1에 위치한다. 1962년 김원룡 교수가 지표에서 채집한 석기와 토기류를 『고고미술』에 소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1972~1978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집자리 16기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남쪽에 위치한 소무산에서 한강과 평행하게 북쪽으로 뻗은 해발 123m 능선에 위치하며, 남동쪽에는 하중도인 강천섬이 자리한다.

집자리 대부분은 구릉의 경사면을 파서 생긴 평지를 바닥으로 하고 이로 인하여 생긴 수직면을 벽면으로 이용하였다. 1~3호 집자리는 남북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부에 있으며, 4~16호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능선 위에 위치한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장방형으로서 장축은 대체로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다. 규모는 작은 것은 길이 5m, 너비 2.5m이고 큰 것은 길이 10m, 너비 4m 정도이다. 면적은 네 벽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 11.6~42㎡로서 상당히 다양하다. 내부에서는 출입구 시설, 기둥 구멍, 저장 구덩이, 화덕 자리, 선반 시설 등이 확인된다. 화덕 자리는 집자리 중앙 축 선을 따라 1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주로 한쪽 짧은 벽 쪽으로 치우쳐 있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 많으며, 구조는 특별한 시설 없이 바닥을 파서 만든 구덩식(竪穴式)이다. 1977년에 발굴된 12호 집자리는 길이 9.7m, 너비 3.7m의 규모로, 모두 39개의 기둥 구멍이 벽선과 중앙선에 3열로 배치되어 있으며, 3기의 화덕 자리와 7기의 저장 구덩이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 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붉은 간 토기,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굽다리(臺附) 달린 붉은 간 토기 편 등과 흙으로 만든 그물추가 있는데, 한반도 동북 및 서북 지역의 토기 요소가 함께 발견되고 있다. 토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 붉은 간 토기는 민무늬 토기에 비하여 점토 광물의 비율이 훨씬 높아 정선된 진흙을 사용하였고 비짐으로 장석(長石)보다 석영(石英)을 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석기는 70년대 당시 4권의 보고서가 발간되었지만 방대한 양의 석기 전부를 보고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석기 연구의 기초 자료 확보를 위해 2004~2005년 청동기 시대 연구 출판 사업의 일환으로 석기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보고된 석기는 총 2,805점으로 이 중 집자리에서 출토된 것은 1,297점이다. 석기는 자루 간 돌검(有柄式磨製石劍), 피 홈(血溝)이 있는 간 돌검, 반달 돌칼, 공이돌(敲石), 돌도끼(兩刃·蛤刃石斧), 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돌살촉(石鏃), 돌 보습(石犁先), 갈돌(碾石棒), 갈판(碾石), 달도끼(環狀石斧), 가락바퀴 등 매우 다종 다양한 형태가 있다. 또한 12호에서는 다량의 탄화미(炭化米)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물이 발견되었다. 탄화미는 단립형(短粒形)의 자포니카(Japonica)로 평양 남경 호남리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유적에서는 사냥채집, 어로방직 활동과 함께 농경을 토대로 최소한의 자급자족적 생활을 영위하는 혼합 경제 형태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는 모두 13점인데 이들을 나이테 연대를 이용하여 연대를 보정하였다. 이 중 7호는 2520±220 BP, 1810±190 BP, 8호는 2696±160 BP, 2666±160 BP, 12호는 3306±70 BP(보정 연대 기원전 1650~1490년), 3007±70 BP(보정 연대 기원전 1300~1030년), 3069±70 BP(보정 연대 기원전 1390~1170년)로 측정되었다.

흔암리 유적은 집자리에서 출토된 탄화미를 비롯한 다양한 곡물 자료를 바탕으로 청동기 시대의 생계 경제 및 문화상 복원 연구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구멍무늬 계통과 겹아가리 계통 토기의 기원 및 한반도 남한 지방에서의 흡수·융합·전개 과정 등을 밝히는 계기가 되어 청동기 시대 토기 연구의 선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