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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사전:액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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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d>Unknown user님의 2024년 1월 7일 (일) 21:4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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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주름
腋注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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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id costume0496
한글 액주름
한자 腋注音
영문(음역) Aekjureum
영문(의미) Man’s half-coat
분류 일상복
성별
시대 조선
연령 성인
신분 사대부
데이터 소스:
☞ 한국연구재단 한국복식사전 【액주름】



정의

  • 조선 전기와 중기까지 착용되었던 겨드랑 주름의 남자용 포
  • Man’s coat with side pleats worn during the early and mid Joseon period

해설

액주름은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을 잡은 옷의 형태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액주름이라는 명칭 외에 액추의(腋皺衣, 1446년), 방습아(傍褶兒), 습아(褶兒)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착용하였는데 저고리보다는 길고 포보다는 짧은, 길이는 100cm를 전후 한 반코트 정도의 상의이다. 영조대의 『상방정례(尙方定例)』나 『의궤(儀軌)』 등과 같은 궁중 기록물에는 조선 말기까지 ‘腋注音’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지만 실제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 역사 속에서 사라진 옷으로 추정되고 있다. 액주름의 깃은 곧은 깃인데 이중깃에서 점차 칼깃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시대가 내려갈수록 철릭의 치마 길이가 상의에 비하여 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겨드랑이의 주름 위치가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특징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12 세종 28년(1446) 5월 25일(임진) 기사에는 액주름을 서민이나 각사 제원(諸員), 대장(隊長), 외방의 일수양반 등과 같이 신분이 낮은 자들의 겉옷이나 관복으로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색(素色)의 명주나 무명 등의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고 홑이나 겹, 솜, 누비 등, 구성법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세부 구조에서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 점 등으로 볼 때, 액주름은 그리 격식을 차린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액주름은 40여 점이다. 경기도박물관 소장의 진주류씨(晋州柳氏) 묘와 심수륜(沈秀崙, 1534-1589) 묘 액주름 유물, 그리고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의 남양홍씨(南陽洪氏, 16세기) 묘 액주름에는 16세기 전기 이전의 포 종류에 보이는 이중깃이 보인다. 특히 남양홍씨 묘에서 출토된 액주름은 아청색 무문단으로 만든 것인데, 앞이 길고 뒤가 짧은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현재까지 발표된 자료 중 가장 늦은 시기의 액주름 유물은 강대호(姜大虎, 1541-1624) 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이 옷에는 칼깃과 좁은 소매가 달렸으며 뒤트임이 있다. 돌띠 고름을 달아 몸에 밀착되어 활동성이 증가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박성실, 1992, 『조선전기 출토복식연구: 임진왜란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세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REF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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