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팀프로젝트 5조 박제영
Jamie's DH Wiki
| 5조 사건 정보 | |
|---|---|
1945 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 ([3]) | |
| 이름 | 홀로코스트 |
| 사건 유형 | 제노사이드 |
| 시작일 | 1933년 |
| 종료일 | 1945년 5월 |
| 가해국가 | 독일 나치 정권, 협력국 |
| 결과 | 600만 유대인 학살 |
연구목적 및 필요성
우리 5조는 역사상 가장 끔직했던 인종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선정하였다. 단순히 사건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사건과 관련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도 함께 살펴보면서 홀로코스트 역사: 실증적 분석과 예술적 재현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교육과정에서 홀로코스트를 가르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시기상 겹치는 일제강점기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고, 우리 인종이 연루된 사건이 아니다 보니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나 지식이 타국가나 인종에 비해 비교적 낮은 것 같다.
우리가 비슷하게 가슴 아픈 역사를 겪였기에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어느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하고 추모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에 딱딱하게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한 글자 씩 마음을 담아 작성해 연구해보고자 한다.
홀로코스트란
홀로코스트(Holocaust) 때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고 부르기도 한다. [1]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 정권이 그들의 동맹국과 함께 조직적, 제도적으로 유럽계 유대인들 외 다수를 탄압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의 시작과 2차대전때 나치가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홀로코스트는 그 잔인한 막을 내리게 된다.
발생 이유
<반유대주의>
이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증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이는 나치가 집권할 당시 지배적으로 쓰였던 이데올로기이며,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원인조차 유대인으로 돌렸고, 독일의 다른 위기와 문제들 역시 유대인들의 탓을 하였다.
나치당은 따라서 독일 게르만 민족을 유대인 민족과 차별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아리아인"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인종의 민족이라 주장하였고, 반대로 유대인 인종은 가장 열등하고 위험하다고 제창하였다.
독일인 혈통, 혼혈,유대인의 등급로 나눈 도표([1])
당시 사회적 분위기
<제 2차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하였다. 이 전쟁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있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영토 상실, 군사력 제한을 겪었다. 이러한 조건은 독일 국민에게 큰 굴욕감과 불만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부상하였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좌절감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우며 지지를 얻었다. 1930년대 동안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확장하였다. 또한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점령 등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지 않고 유화정책으로 대응하였다. 1939년 독일은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와 태평양,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결국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다. [2]
히틀러와 나치([2])
<나치즘> 나치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혼란 속에서 탄생한 극우 전체주의 이념이다.이 틈을 타 급진적인 정치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 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었다.히틀러는 강한 리더십과 선동적인 연설을 통해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반공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다.그는 독일의 영광 회복과 인종적 순수성을 주장하며 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였다.1923년 뮌헨 폭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히틀러는 이후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하며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다.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독일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나치당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1933년 히틀러는 총리에 임명되었고, 이후 독재 체제를 수립하며 나치즘을 독일의 국가 이념으로 만들었다. [3]
희생자들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들은 유대인이다.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는데, 270만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대량 총살 작전과 관련 학살에 살해되었다.800,000~1,000,000명의 유대인이 게토, 노동 및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수용소와 게토 외부에서 벌어진 폭력 행위로 최소 250,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그런데 나치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역시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소련군 전쟁 포로는 약 330만명,비유대인 폴란드인 약 180만명, 롬인 남성, 여성, 어린이 및 경멸하게 "집시"로 분류된 사람은 최소 250,000명, 최대 500,000명,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당국에 의해 살해된 세르비아 민간인은 310,000명 이상, 기관 및 보호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최소 10,0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250,000~300,000명, 독일의 정치적 정적 및 반대자 수만 명,"상습범"이나 "반사회적"로 분류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독일인 약 35,000명,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거나 독일군 복무를 거부한 이유로 처형당한 여호와의 증인 약 1,700명,동성애/양성애 남성,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 남성 수백 명, 수천 명, 독일의 흑인 알 수 없음(수백명 추정)
의 비유대인들을 살해하였다.
결과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패배하면서 끝이 났다. 연합군들은 수용소들의수감자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된 후에도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맞서야했으며 실종된 가족들을 찾느라 수년간 헤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결과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들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삶을 다시 재건시키는데 큰 제한을 두기도 하여, 일부 유대인들은 난민 수용소에서 삶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이번 시멘틱 데이터를 구축할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중심이 되는 홀로코스트사건을 어떠한 연결어로 연결시킬 것인가 였다. 모든 키워드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중심어로 연결이 되지만, 또 키워들 사이끼리의 유기성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멘틱 데이터를 만들기 전에 수업시간에 했던 실습을 참고하여 수기로 그려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먼저 그려보니 막상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복잡한 키워드도 있었고, 더 단순한 키워드도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시멘틱 데이터로 옮기니 더 깔끔하고 정제된 상태로 만들어진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가설명 등을 통해 키워드들을 더 퍼트려 나가고 싶은데 시간과 나의 위키문법 활용 제약 때문에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참고 자료
이미지
- 독일인 혈통, 혼혈,유대인의 등급로 나눈 도표 - 출처:홀로코스트 백과사전
- 히틀러와 나치 - 출처:
논문 및 문헌
- 임지현. (2016). 전지구적 기억공간과 희생자의식-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스탈린주의테러의 기억은 어떻게 만나는가? -. 대구사학, 125(0), 385-417. 10.17751/DHR.125.385
신문기사 및 사이트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