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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팀프로젝트 5조 양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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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민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5월 23일 (금) 12: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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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 - 아우슈비츠 수용소







연구목적 및 필요성

우리 5조는 예술 작품으로 본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연구하기로 했다. 나는 이번 개별 프로젝트에서는 홀로코스트 사건의 중심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연구하려 한다.

우리 조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연구하는 데 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중심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우슈비츠는 단순한 수용소를 넘어,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이 가장 집약적으로 실행된 장소이자, 홀로코스트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약 130만 명 이상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다.[1] 이처럼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구조적 폭력, 인간의 존엄성 파괴, 그리고 기억의 형성이라는 주제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수용소를 이해하는 것은 곧 홀로코스트 전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 집단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간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되새기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를 예술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연구 대상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으로,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들은 모두 수감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다.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집단 수용소의 감독부 산하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941년부터 1942년 3월까지 집단 수용소 감독부는 SS 본부의 산하기관 및 SS 작전 본부 산하기관이었다. 1942년 3월부터 아우슈비츠가 해방될 때까지 감독부는 SS 경제-관리 부처의 산하기관이었다.[2] 각각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들과 부속 수용소들의 총 3가지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첫째, 나치 통치에 실질적인 절대 세력이거나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감금하기 위하여. 둘째, SS 부대 소유의 건설 관련 사업, 추후에는 군사 장비 및 전쟁 관련 물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하여. 셋째, SS와 경찰, 나치 독일이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은 소수의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우슈비츠 제 1호

아우슈비츠의 가장 중요한 수용소에 해당하는 곳으로, 제 1호는 오슈비엥침 시 외곽에서 구 폴란드 군막사를 개조해 1940년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로 운영되었으나, 이후에는 SS본부, 멩겔레 사무실 등 행정 본부의 기능을 수행했고, 크레마토리움1이라는 초기 가스실 시험이 운용되었으며, 멩겔레 의사에 의해 잔인한 의학 실험이 진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죽음의 벽'이라는 곳에서 총살을 하는 등 고문과 처형도 자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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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BEIT MACHT FR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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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에 있던 문구



아우슈비츠 제 2호

시체소각실[5]

아우슈비츠 제2호의 다른 이름은 아이슈비츠-비르케나우로, 첫번째 수용소에서 약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에서 1041년부터 건설되었다. 이 곳에서는 최대 규모의 가스실과 크레마토리움 4기가 운영되었으며, 집단학살이 주로 발생했다. 유대인, 집시, 여성/아이, 노약자들이 선별의 과정을 거쳐 가스실로 이동되었으며, 1944년에는 유대인 40만명이 이 곳에서 살해되었다. 이곳은 최대 규모의 수용소로, 여성 구역, 집시 가족 구역, 수용자 병원, 가스실 등의 다양한 공간 분리가 이루어졌다. 특히나 선로가 캠프 안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도착 후 바로 선별하고 선별 즉시 가스실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대량 학살 시스템이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이곳은 아우슈비츠 전체 학살의 심장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 제 3호

제3수용소-[6]

부나 또는 모노비츠라고도 불리우는 아우슈비츠 3호는 폴란드 모노비체 외곽에 위치한 부나 합성 고무 공장에서 일할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42년 10월에 건설되었다. 아우슈비츠 3호는 인근 독일 화학 기업인 IG Farben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이 곳에서 수용자들은 하루 12-14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으니 제대로 된 노동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영양 부족, 질병, 혹한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사망에 이르렀다. 또한, 노동력 착취를 위해 건설된 수용소인만큼 생산성이 떨어진 즉시 선별 후 처형당하거나 제2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외에도, 수십 개의 부속 수용소들이 존재했는데, 이는 나치와 독일 산업계가 지역 곳곳에서 수용자들을 유동성 인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Jawischowitz, Gleiwitz, Budzyn, Trzebinia 등의 지역에서 탄광, 공업, 전쟁 산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용자들에게 극한의 노동을 시키며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었는가?

인종별로 보자면, 가장 많은 수의 희생자는 단연 유대인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7]'이라는 나치의 계획 하에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 위해 운영된 주요 수용소 중 하나였다. 유럽 전역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강제노동, 굶주림,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로마인(집시)들도 유대인과 비슷하게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어 박해당했는데, 아우슈비츠에는 집시 가족 수용소가 따로 있었으며 이들 또한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폴란드계 사람들은 특히나 지식인, 종교인 정치 저항자들이 타겟이 되었다. 나치 독일의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잔혹한 통치를 받았으며, 수많은 폴란드 민간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이 외에도, 나치의 '사회적 순수성' 정채에 따라 동성애자, 장애인, 여호와의 증인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는 강제노동, 고문,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며 강하게 탄압받았다.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은 즉시 '선별'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선별은 SS 의사나 장교들이 육안으로 보며, 대체로 성인 남성들이 해당되었던 노동 가능자로 판단되면 살아남아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을 하며 고문 당하고, 대체로 여성과 아이, 노인등이 속했던 노동 불가능자로 판단되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지는 과정을 일컫는다. 여성과 아이들 중 일부는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 실험을 주도했던 사람이 요제프 멩겔레이다.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멩겔레는, 특히 쌍둥이, 장애아, 난쟁이, 로마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 쌍둥이 실험, 눈 색깔 실험, 절단/접합 실험, 불임 실험 등을 통해 수많은 희생자들을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외에도 안락사 프로그램, 가스 밴, 집단 학살 수용소, 집단 수용소에서 가스 학살의 방법을 통해 수많은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해방되었는가?

아우슈비츠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진입하면서 해방되었다, 이 날은 아직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해방 전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나치는 소련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서 소각, 가스실과 크레마토리움 폭파 등 증거 인멸 작업을 시도했으며, 대부분의 수감자는 강제로 '사망 행진'에 동원되었다.

대부분이 유태인인 수만 명의 수감자들은 북서쪽으로 55킬로미터를 행군하여 글라이비츠에서 비스마르크호이테, 알트하머 그리고 히덴부르그와 같은 북부 실레지아의 동쪽 보조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합류하거나, 서쪽으로 63킬로미터를 행군하여 북부 실레지아의 우지슬라우(로슬라우)에서 자비스코비츠, 체코비츠 그리고 골레샤우와 같은 아우슈비츠 남쪽 보조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합류하였다. SS 경비대는 대오에서 낙오하거나 행군을 계속할 수 없는 자들은 무조건 사살하였다. 행군 과정에서 수감자들은 추운 날씨와 굶주림 그리고 과도한 햇빛에 노출로 인하여 계속적인 고통을 받았다. 글라이비츠 경로에서만 적어도 3,000명의 수감자들이 죽었으며 아우슈비츠에서 보조 수용소로 이동하는 철수 과정에서 15,00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라이비츠와 우지슬라우에 도착한 수감자들은 난방 시설이 없는 기차에 실려 독일 지역의 플로센뷔르크, 작센하우센, 그로스-로젠, 부헨발트, 다하우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등으로 수송되었다. 이러한 철도 여행은 4일이나 걸렸다. 음식과 물, 잠잘 곳과 담요도 없는 가운데서 많은 수감자들은 이러한 수송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하였다.

1945년 1월 말, SS와 경찰 간부들은 아우슈비츠-모노비츠의 보조 수용소인 블레흐하머에서 4,000명의 수감자들을 도보로 철수시켰다. 이 수감자들을 그로스-로젠 집단 수용소로 행군시키는 과정에서 SS는 약 800명의 수감자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SS 장교들은 아프거나 혹은 숨는데 성공하여 행군을 하지 않고 블레흐하머에 남아있던 수감자 200명 가량을 살해하였다. 일정이 약간 지체되기는 했으나, SS는 약 3,000명의 블레흐하머 수감자들을 그로스-로젠에서 독일의 부헨발트 집단 수용소로 수송하였다. 이 사망 행진이란, 수감자들로 하여금 눈과 추위 속에서 수백 km를 행진하게 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총살, 아사, 동사 등 다양한 이유로 사망했다. 이 행진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약하거나 병들어 도망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내부에 약 7000명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소련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들과 함께 8톤 분량의 인간 머리카락, 38만 켤레의 구두, 수천 점의 의복, 여행 가방 및 가스실 잔해와 시체와 뼛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보는 생생한 사진과 영상들 또한 아우슈비츠 해방 당시의 기자들과 촬영팀들에 의해 기록된 것들이다. [10]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이번 시맨틱 네트워크 구축 과정에서는 시맨틱 데이터 구성 시 마주할 수 밖에 없던 몇 가지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로 직면한 고민은 어떤 정보를 노드로 추출하고, 어떤 정보를 속성값으로 남겨둘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었다. 예컨대, 폴란드인과 유대인의 희생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유대인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폴란드인의 경우 주로 지식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지식인'을 별도의 노드로 설정할 지 아니면 노드로 작성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정보라 오히려 시맨틱 데이터가 정보가 어수선해질까를 고민을 했다. 고민한 끝에, 폴란드인이라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강조해야 폴란드인을 노드로 빼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했고, 초기에 아우슈비츠 제 1수용소에는 폴란드인이 많았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고 이러한 관계의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하여 결국 노드를 따로 빼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로는 SS본부와 아우슈비츠 내 각 수용소(제1, 제2, 제3수용소)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SS본부를 개별 수용소와 각각 연결할지, 아니면 아우슈비츠 전체와만 연결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본 연구에서는 SS본부가 아우슈비츠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음을 구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아우슈비츠 노드와 SS본부 노드를 직접 연결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통해 전체 수용소 시스템의 상위 통제 구조를 시각적으로 명확히 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처음에는 자료조사 직후 곧바로 링크와 노드를 작성해 시맨틱 네트워크를 그렸지만, 정보 구조가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프를 설계하려 하다 보니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따라 2차 작업부터는 시맨틱 데이터를 구축하기 전, 수기로 마인드맵을 작성하여 조사된 정보를 구조화한 후 시맨틱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마인드맵과 시맨틱 그래프를 비교하면서, 정보 간 관계의 중복이나 누락을 점검하고, 내가 그린 마인드맵과 모양이 다르게 구조화 된 부분들에 대한 관계성을 고민하면서 구조적 오류를 개선하고 보다 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래프가 완성된 후에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래프를 해석해보는 자가 피드백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노드 간 연결선의 흐름, 시각적 집중도, 정보 계층 구조 등이 적절하게 표현되었는지 점검하며 가독성과 정보 전달력을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만약, 내가 처음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정보를 접한 사람이라고 가정했을 때, 시각적으로 한 번에 정보들이 눈이 들어오는가에 대해 고민하며 구축했는데 이 부분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단순한 시각화 작업을 넘어, 정보 구조화의 원칙과 시맨틱 모델링의 복합적 판단 기준을 경험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는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같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작성자의 의도, 즉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 달라짐에 따라 정보의 구성도 달라진다라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라는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 만들었지만, 정보를 거듭해서 수정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생기면서 정보 간의 관계성도 새롭게 구축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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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문헌




신문기사 및 사이트




주석

  1. [1]
  2.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아우슈비츠
  3. 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4. 사진출처:By xiquinhosilva - https://www.flickr.com/photos/xiquinho/16380127035/,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6102385
  5. -사진출처:By <a href="//commons.wikimedia.org/wiki/User:Sfu" title="User:Sfu">Marcin Białek</a> - 자작, <a href="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title="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CC BY-SA 3.0</a>,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470481">링크</a>
  6. 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7. 최종 해결책은 나치가 유대인을 전멸하려는 계획을 완곡하게 돌려 표현하는 용어이다.
  8. 사진출처:By Unknown, i.e. either Bernhard Walther or Ernst Hofmann or Karl-Friedrich Höcker - USHMM,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4059687
  9. 사진출처:https://www.joongang.co.kr/article/4945319
  10.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