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팀프로젝트 3조 소재환
Jamie's DH Wiki
| 3조 인물 정보 | |
|---|---|
| 이름 | 김수영 |
| 생년 | 1921년 |
| 몰년 | 1968년 |
| 국적 | 대한민국 |
| 계열 | 참여시 |
| 호 | 미상 |
| 유형 | 시인 |
연구목적 및 필요성
3조는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과 세 차례의 독재를 거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언어를 활용하는 시는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로 하여금 통찰을 체험하게 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거나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시의 특징에 의하면, 시를 통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문학계에는 대립구도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순수문학과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을 포함한 삶을 위한 문학을 지향하며 현실 반영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 참여문학을 두 축으로 가졌다.
이때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주장하였던 인물로, 1968년에 순수문학 계열의 이어령 시인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에 이어령 시인은 참여론의 확대를 우려하며 순수문학의 위치를 제시하였는데, 김수영 시인은 이러한 이어령 시인의 논지에 반기를 들며 강한 검열이 이루어짐에 따라 현실참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비판하였다.[1] 이렇듯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기에 순수시와 참여시라는 문학계의 흐름을 중심으로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는 3조의 팀프로젝트에 있어 핵심 인물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직후의 이념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를 거쳐 1950~60년대에 6.25 전쟁 및 4.19 혁명을 피부로 경험하며 문학계에서 활약한 김수영 시인은 '자유'라는 이념을 갈망하며 정치 현실에 대한 시와 문학의 실천적인 책무를 강조한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혼란스럽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와 정치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움을 이어 나간 그의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 등의 시를 통해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과 김수영 시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시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김수영 시인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에 김수영 시인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연구 대상
김수영의 생애
김수영(金洙暎) 시인은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초기 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난해한 성향을 띄었다. 그러나 4.19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의 시는 자유의 이념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적인 비애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들을 발표했다.[2]
그는 1921년 11월 27일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다음해 김수영 일가는 종로6가로 이사했는데, 김수영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3] 그의 집은 그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시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지만, 동대문 앞의 골목길 안에는 그의 고모가 여전히 살고 있었기에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을 때도, 해방공간의 소음을 피해 숨어 있을 때도 김수영이 거처는 바로 그 동대문 앞의 골목길에 있었다. 그의 집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유력가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압력에 의해 집안 사정이 악화되었다. 장남이었던 김수영 시인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요구보다 식민 현실의 모순 앞에 똑바로 서서 견디며 삶을 지탱하는 개인이라는 과제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행에 취직해 집안을 건사해줄 것을 바랐던 부모님을 뒤로 하고, 일본에 건너가 연극에 심취하였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 시기였기에 식민 본국의 자유는 온전치 못했다. 그는 일본 본토를 향한 미국의 공격을 피해 귀국하여 연극계에서 연출 보조 등의 업무를 맡다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길림극예술연구회로 만주에서 활동하며 1945년에는 길림공화당에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 충무로로 다시 귀국하게 된다.
묘정의 노래(출판N(2021.12.))
귀국 이후 그는 연극에서 벗어나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의 등단작은 「묘정(廟廷)의 노래」이다. 이는 고전적 정서와 언어를 가진 시로, 등단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동양적 전통에 기반한 삶과 사유의 바탕과 정신 세계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전통적 서정에 집중하기 보다 현대적 혁신의 언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6.25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가 인민군 훈련을 받았던 김수영 시인은 민간인 억류자 신분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영어로 소통할 줄 알았기에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고, 또 수용소 병원 조무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4] 전쟁을 겪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김수영은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 셋방을 전전하다 마포구 구수동에 집을 장만하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글을 쓰며, 생활의 방편으로 닭을 키우며 지냈다. 1968년 6월 15일 밤, 김수영은 청진동의 선술집에서 문인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졌고 다음날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유해는 도봉산의 선영에 묻혔다.[5]
김수영과 자유(6.25 전쟁, 4.19 혁명)
김수영 시인의 생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대표적인 참여문학 계열 시인으로, 6.25 전쟁과 4.19 혁명 등을 겪으며 관련된 경험과 사유가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김수영 시인은 '자유'라는 요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수영이 포로생활을 겪었던 부산거제리 포로수용소(연합뉴스)
먼저 6.25 전쟁의 경우, 김수영 시인은 전쟁을 겪으며 실제로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1953년에 쓰여진 「내가 겪은 포로생활」 등과 같이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던 사건을 산문으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치욕스러운 경험이 많은 김수영 시인의 개인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좌우 양쪽 진영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김수영 시인은 자유에 천착하게 되었다. 이때, 자유는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그에게 자유란, 서구 민주주의식 자유, 존재론적 자유 등 이념적, 정치적 특징에 국한된 자유라기보다는 시를 통해 꿈꿀 수 있는 자유 및 자유적인 투쟁에 집중하였다. 이는 위 시에서 잘 나타난다. 즉, 그는 시의 기본적 가치를 자유로 보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위 시에서 나타나는 강한 어조는 4.19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검열과 억압이 강한 시대적인 상황 속 진정한 자유가 도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김수영 시인이 알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4.19 세대 시인으로도 많이 일컬어지는데, 보통 4.19 혁명 당시 김수영은 당시 이미 40살 무렵이었다. 이는 혁명의 에너지가 소진된 무렵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혁명을 사유하고 각성을 추동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4.19 세대 시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는 영어에 익숙해 통역 업무를 맡을 정도였으며 서양 사상에도 능통했다. 그는 서구의 모더니티는 기존의 규범에 대한 해체나 혁명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 가능한 것이라 보기도 하였는데, 독재정권 하에서 질서에 대한 해체가 불가능한 후진성이 나타나는 한국을 보며 이러한 후진성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 자유가 도래한 것 같았으나 계속되는 검열과 바뀌지 않는 세상에 불만을 토로하였고, 진정한 혁명은 정치, 권력, 체계의 교체만이 아닌 생활 속 자유정신의 체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는 정부에 의해서만이 아닌 신문사 내규로 자신의 시 출판이 거절되었음을 알게 되는 등의 현실을 보며 이러한 사유를 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묻어난 시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이다.[6]
김수영의 시기별 시 세계 및 주요 작품
1940년대에 김수영 시인의 시는 전통, 주체, 초현실주의라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 전통을 대표하는 시는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藝術部落)』에 게재한 그의 등단작「묘정의 노래」이다. 그의 시들은 전통을 역사적 범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역사는 그의 초기 시에서는 비판의 대상에 해당한다. 그가 1950년대 내내 과거를 부정하는 작업에 집중했던 이유가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체중심주의의 근대철학의 내용이 ‘책’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다. 이때 책의 내용은 독자가 그 내용을 상상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미국에서 건너온 책을 문제 삼고 있었는데, 미국은 조선 사람들이 가진 이해의 지평 너머에 있는 나라였다. 그 책을 주체와 연관시키는 것은, 고통스럽더라도 주체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주체 스스로 구성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의 또 하나의 요소는 미적 근대성으로서의 초현실주의적 시작 방법이다. 초현실주의는 자기부정과 현실부정의 태도를 주요 동인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정신을 그의 시 세계에 있어 하나의 기본 요인으로 삼은 것이다.
6.25 전쟁 이후 그는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속도주의로서의 근대의 완성을 추구한다. 1956년까지는 그의 정서적 지향점이 전근대적인 것에 있었다. 근대에 의해 파괴된 전근대의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준 사건이 6.25 전쟁이었으며, 그 전쟁은 곧 고통스러운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근대는 거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체험을 통해 그는 근대를 거부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고, 그 후 그는 근대를 완성함으로써 그 근대를 벗어나는 일을 삶의 방식으로 택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기부정의 정신이었다. 자신 및 현실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대인이 되어야 했고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의 속도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적 행동은 근대 자체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는 출발에서 죽는 것을 영예로 안다(「비」)는 진술이나 문명을 아는 자는 그 문명을 차버린다(「미스터 리에게」)는 진술은 전쟁으로 현상한 폭력의 경험이었던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 그 근대를 완성하는 것에 있음을 자각한 후의 발언이다. 이를 실행한 김수영의 시가 과거를 부정하는 망각으로서의 모더니즘이다. 근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근대를 부정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그가 추구했던 근대 완성의 주체는 철저한 개인이었다.[7]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수록된 대표적 작품들은 「달나라의 장난」, 「헬리콥터」, 「병풍」, 「눈」, 「폭포」 등을 꼽을 수 있다.[8]
개인주의적 시 세계를 넘어서는 계기를 김수영에게 준 것은 4.19 혁명의 경험이었다. 그는 4.19 혁명을 겪으며 공동체의 힘으로 근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의 시적 주체는‘우리’이다. 이를테면 시적 자아가 1950년대의 개인적 자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아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에게는 일종의 행복의 경험이었는데, 그는 곧 4.19 혁명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다시 ‘나’라는 개인의 시적 주체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혁명의 정신을 완전히 불신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정치적 혁명에는 좌절했지만 그에 대비되는 존재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의 일차적 목표가 정치에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1960년 6월 16일 그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고독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혁명은 시적 혁명이 된다. 이로부터 김수영이 지향하는 두 가지 세계가 나타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시를 통한 존재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세계이다. 이것을 주체와 대상이 명확해진 상태라고 해도 될 것이다. 둘을 합해서 말한다면 정치적 변화는 고독한 주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개인의 고독한 혁명이 개인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이 시기 김수영 시 세계의 큰 변모가 있다.
5.16 군사 쿠데타는 그에게는 다시 한번 현실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것은 그가 1950년대 내내 추구했던 속도주의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가를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역설의 경험이었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신귀거래」 연작을 통해 ‘풍자와 해탈’의 관계에 대한 획기적 인식을 보여주었는데, 풍자는 삶에의 몸담음을, 해탈은 삶으로부터의 초월을 가리키지만, 그 해탈은 풍자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그의 시는 말하고 있다. 풍자가 삶에의 몸담음이고 그 삶이 일상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가 들어간 영역은 일상이었다. 그가 일상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말을 빌리면,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의미를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일상에 집중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근대의 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삶을 철저하게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일상이 단선적이고 발전적인 역사관에 의해 선택되고 배제되는 현실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뒤엉켜 시간을 구성하는 현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대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이 공존의 역사관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일상은 어떤 단일한 목표로 수렴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 그 자체를 크게 맴돌면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9]
나아가 1960년대에는 그의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가 나타남에 따라 참여계열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이 시기 대표작품으로는 「푸른 하늘을」, 「후란넬저고리」, 「강가에서」, 「거대(巨大)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엔 카운터지(誌)」, 「풀」을 들 수 있다. [10]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가 실린 『창작과비평』 1968년 가을호 지면(한겨레)
김수영 시인은 그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온몸의 시학을 추구하였다. 순수-참여논쟁의 맥락 하에서 이를 살펴보면, 60년대 참여문학에 초점을 둔 시학이라고 볼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 의하면, 그는 온몸으로 부딪혀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 시쓰기라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온몸으로 부딪히며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결합한 형태로 시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풀」은 이러한 온몸의 시학에 기반하는 김수영 시인의 최후의 결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김수영 시인이 언급한 ‘온몸’은 시작의 주체로서, 살과 뼈와 근육을 가진 실제적인 몸이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몸이다. 온몸은 비유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몸으로써 움직이고 운동하는 몸을 전제로 한다. 온몸은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미지와 혼돈의 세계를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풀은 행동과 이동이 자유로운 동물과 달리 뿌리를 박고 있는 땅에 평생을 매여 있는 식물로서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풀」에서 수동적인 풀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능동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킨다. ‘눕다’와 ‘일어나다’ 두 동사는 ‘나부끼다’와 달리 능동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움직임인데, 여기에는 풀의 고유한 힘인 탄력과 반동력이 있다. 풀의 눕고 일어남에는 바람의 힘에 밀리는 과정과 그것에 밀리지 않으려는 탄력과 반동력의 미세하고 무수한 과정이 있는데, 이것이 떨림이며, 이 떨림이 시인의 감수성과 만나 감정적으로 변화된 것이 ‘울다’, ‘웃다’ 두 동사이다. 풀의 누움과 일어남, 울음과 웃음 등 네 가지 움직임은 바람과 동시에 생긴다. 풀이 육체에 구속된 한계와 수동성을 넘어서는 것 은 풀과 바람이 일체가 될 때이다. 바람은 풀 속에 있는 탄력과 반동력을 깨워 활동시킨다. 이 힘이 풀에게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몸과 삶의 부조리를 밀고 나가는 ‘온몸’이 되도록 한다. 풀은 바람을 육화시켜 수동성을 능동적으로 전환시키고 땅에 구속된 삶에 역동적인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풀뿌리가 눕는다”는 표현에 이르러 풀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풀잎의 운동에 그치지 않고 뿌리까지 이어지는 온몸의 운동을 보여준다. 뿌리의 움직임은 지상에서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풀잎의 움직임과 달리 팽이의 정중동의 운동, 복사씨와 살구씨에 내재된 ‘단단한 고요함’과 같이 잠재적인 움직임이다. 뿌리의 움직임에는 외부의 힘에 휘둘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단단한 고요함을 유지하는 힘, 외부의 모든 변화를 포용하고 육화시키는 풀의 작용 등이 있는데, 이 움직임은 온몸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몸’은 밀고 나가는 행동이며 움직이는 몸이므로 힘이 있고, 속도가 있다. 풀에서 그 힘과 속도는 바람보다 빨리 눕고 빨리 울며,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바람보다 빠르고 순서가 앞서는 풀의 운동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먼저 일어나는 것은 바람이 불기 전부터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탄력과 반동력이다. 그 힘은 순간 속에서 태동하여 풀의 운동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잠깐의 방심과 나태와 안정을 허용하지 않는 순간의 속도와 힘은 팽이 이미지나 폭포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팽이의 ‘스스로 도는 힘’에는 방심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순간의 운동이 있으며 곧은 소리로 두려움 없이 떨어지는 폭포에도 나태와 안정을 뒤집는 엄격한 순간의 힘과 속도가 있다. 순간에서 배태된 힘과 속도가 풀의 운동에 긴장감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순간의 윤리는 새로운 문학의 모험을 위해 침을 뱉자고 하거나 눈에 대고 기침하자는 요청에도 나타난다. 침 뱉기와 기침에는 분절된 언어를 통한 의미 부여나 설명은 없으나 그보다 강력한 힘과 속도가 있으며 그것을 배태하는 순간의 윤리가 있다. 시 쓰는 주체로서의 온몸은 힘과 속도와 순간의 윤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시와 삶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사랑이며 시의 형식인 것이다.
그는 풀을 움직이는 몸, 행동하는 주체로서 관찰하였으며, 그 몸과 움직임에서 탄력과 반동력을 발견하고 능동적인 의지를 이끌어냈다. 그때 풀은 바람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육화하여 능동적인 힘으로 전환시키고 그 힘으로 자신이 처한 삶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존재가 된다. 그 움직임과 행동에는 방심과 나태를 허용하지 않는 순간의 윤리가 있으며 그것이 풀의 몸과 삶과 운명에 역동적인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풀」은 온몸의 시학이 탁월하게 적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11]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해 알 수 있듯, 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라고 여긴다. 여기서의 “온몸”은 연대를 통해 하나가 된 풀일 것이다. 그리고 이 풀이 “밀고 나가” 마침내 도달할 곳은 거세게 날뛰고 있는 동풍의 “온몸”일 것이다.[12]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김수영 시인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정부 수립과 남북 분단을 거쳐 첫 정부가 4.19 혁명으로 막을 내리고, 이후 5.16 쿠데타를 통해 박정희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고스란히 겪은 인물이었다. 사회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발생함에 따라 그의 문학 경향과 시 세계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모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는 역사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폭력 속에서 시적 자유를 추구하며 온몸의 시학을 이야기함으로써 현대 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이 되었다. 개별콘텐츠 페이지를 구성하기 위한 큐레이션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의 생애를 검토한 후 작품 활동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가 시기마다 어떠한 경험에 의해 어떠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 문학의 역사와 흐름를 이루었는지를 거시적으로 추정 및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전까지는 단순히 참여문학 계열에 속하는 김수영 시인이 온몸의 시학을 주장했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나 자료조사와 큐레이션 작업을 통해 그보다 나아가 김수영 시인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러한 시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고, 그것이 최후의 결산으로써 그의 유명한 작품 「풀」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만 김수영 시인의 생애와 작품 활동, 시 세계를 정리한 이후, 그에 관해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고민과 한계에 직면하기도 했다. 약 30개의 노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노드를 어떻게 구성해야 적합할 지에 관해 오래 고민하였다. 팀프로젝트의 핵심 노드라는 점에서 연결관계를 위해 김수영 시인을 개별콘텐츠의 주제로 선정하였는데, 시인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했을 때의 특성상 30개의 노드를 구성하는 것에 있어 그의 여러 작품들을 노드로 선정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나 4.19 혁명 등과 직접적인 연결점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은 노드 간 연결성을 여러 부분에서 찾을 수 있어 괜찮았지만, 그 외의 작품들은 김수영 시인 외의 다른 노드와 관계를 설정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보이지만, '김수영 시인'이라는 노드를 중심으로 그래프를 바라보았을 때는 다소 마인드맵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외의 작품들도 모두 4.19 혁명이나 6.25 전쟁, 5.16 쿠데타를 전후로 하여 시기상 유사하게 출판된 것들이지만, 김수영 시인의 생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모든 시가 그러한 사건을 직접 배경으로 두고 있지는 않기에 사건이나 정권 노드와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편 그럼에도 그 작품들은 김수영 시인의 시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기에 노드에서 제외할 수는 없어 결국 노드로 유지하였다. 이에 참여시와 연결되는 작품들을 별도로 묶어 관계를 설정하기도 했으나, 참여시 노드와 연결되는 작품은 보통 사건 노드와도 연결이 되었기에 전술한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 고민이 조금 더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참여시' 노드에는 '계열'이라는 클래스를 부여하였는데, 이 클래스에 속하는 노드는 그래프에서 '참여시'가 유일했다. 우선 이 참여시라는 요소는 팀프로젝트 콘텐츠 회의를 진행할 때는 시인의 생애를 모두 다루는 개별콘텐츠의 특성상 순수시와 참여시를 모두 작성한 사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작품의 속성으로 부여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개별콘텐츠를 제작하며 김수영 시인의 경우에는 순수시로 전향한 사례에 해당하지 않았고, 그의 생애 말미인 1960년대에 강렬한 현실비판 의식과 저항정신에 기반한 시 세계가 구축됨에 따라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자리잡았기에 인물과의 관계로 정의해도 무방할 것 같다고 판단하여 노드로 선정하였다. 특히 참여시라는 것이 팀프로젝트와의 연결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기에 비록 '계열'이라는 클래스에 이 노드 한 개만 존재하게 되었지만, 수정하지 않고 유지하였다.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다시 한 번 큐레이션을 검토하니 김수영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더욱 명료해졌다. 특히 「신귀거래」와 같이 두 개의 사건과 연관되는 작품을 발견하는 것이 더욱 용이했고, 각 정부와 연관되는 특정 사건과 그의 작품의 연결성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기에 대한민국의 역사와 김수영 시인을 중심으로 한 문학의 흐름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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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정의 노래 - 출처: 박수연, "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②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출판N(2021.12.)
- 김수영이 포로생활을 겪었던 부산거제리 포로수용소 - 출처:김재홍, "김수영 시인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 발굴" , 연합뉴스(2011.01.11.)
-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가 실린 <창작과비평> 1968년 가을호 지면 - 출처: 신형철, "김수영…무의식의 힘을 믿은 그는, 온몸으로 시를 썼다", 한겨레(2021.10.31.)
논문 및 문헌
- 한혜린, 문학이란무엇인가 3차시 강의자료 <문학과 사회/삶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p.24
- 한혜린, 문학이란무엇인가 11차시 강의자료 <김수영과 김춘수> pp.12-14
- 김기택. "김수영의 「풀」에 나타난 ‘온몸’의 특징." 국제한인문학연구 -.20 (2017): 67-99.
신문기사 및 사이트
- 전통문화포털, "김수영"
- 차선일, "자유를 갈망한 모더니스트, 도봉구의 시인 김수영", 지역N문화
- 박수연, "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②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출판N(2021.1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수영"
- 김한솔, "저항하는 예술 ① - 풀이여, 온 몸을 던지라, 김수영의「풀」", 데일리아트(2024.12.09.)
주석
- ↑ 한혜린, 문학이란무엇인가 3차시 강의자료 <문학과 사회/삶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p.24
- ↑ 전통문화포털, "김수영"
- ↑ 차선일, "자유를 갈망한 모더니스트, 도봉구의 시인 김수영", 지역N문화
- ↑ 박수연, "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②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출판N
- ↑ 차선일, "자유를 갈망한 모더니스트, 도봉구의 시인 김수영", 지역N문화
- ↑ 한혜린, 문학이란무엇인가 11차시 강의자료 <김수영과 김춘수> pp.12-14
- ↑ 박수연, "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②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출판N(2021.12.)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수영"
- ↑ 박수연, "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②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출판N(2021.12.)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수영"
- ↑ 김기택. "김수영의 「풀」에 나타난 ‘온몸’의 특징." 국제한인문학연구 -.20 (2017): 67-99.
- ↑ 김한솔, "저항하는 예술 ① - 풀이여, 온 몸을 던지라, 김수영의「풀」", 데일리아트(2024.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