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2025-1:팀프로젝트 3조 소재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Jamie's DH Wiki

90번째 줄: 90번째 줄:
 
</gallery>
 
</gallery>
  
먼저 6.25 전쟁의 경우, 김수영 시인은 전쟁을 겪으며 실제로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1953년에 쓰여진 「'''내가 겪은 포로생활'''」등과 같이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던 사건을 산문으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치욕스러운 경험이 많은 김수영 시인의 개인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좌우 양쪽 진영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김수영 시인은 자유에 천착하게 되었다. 이때, 자유는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그에게 자유란, 서구 민주주의식 자유, 존재론적 자유 등 이념적, 정치적 특징에 국한된 자유라기보다는 시를 통해 꿈꿀 수 있는 자유 및 자유적인 투쟁에 집중하였다. 이는 위 시에서 잘 나타난다. 즉, 그는 시의 기본적 가치를 자유로 보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먼저 6.25 전쟁의 경우, 김수영 시인은 전쟁을 겪으며 실제로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1953년에 쓰여진 「'''내가 겪은 포로생활'''」 등과 같이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던 사건을 산문으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치욕스러운 경험이 많은 김수영 시인의 개인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좌우 양쪽 진영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김수영 시인은 자유에 천착하게 되었다. 이때, 자유는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그에게 자유란, 서구 민주주의식 자유, 존재론적 자유 등 이념적, 정치적 특징에 국한된 자유라기보다는 시를 통해 꿈꿀 수 있는 자유 및 자유적인 투쟁에 집중하였다. 이는 위 시에서 잘 나타난다. 즉, 그는 시의 기본적 가치를 자유로 보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인용문|
 
{{인용문|

2025년 5월 15일 (목) 19:49 판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3조 위키페이지




3조 - 김수영






연구목적 및 필요성

3조는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과 세 차례의 독재를 거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언어를 활용하는 시는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로 하여금 통찰을 체험하게 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거나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시의 특징에 의하면, 시를 통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문학계에는 대립구도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순수문학과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을 포함한 삶을 위한 문학을 지향하며 현실 반영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 참여문학을 두 축으로 가졌다.

이때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주장하였던 인물로, 1968년에 순수문학 계열의 이어령 시인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에 이어령 시인은 참여론의 확대를 우려하며 순수문학의 위치를 제시하였는데, 김수영 시인은 이러한 이어령 시인의 논지에 반기를 들며 강한 검열이 이루어짐에 따라 현실참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비판하였다.[1] 이렇듯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기에 순수시와 참여시라는 문학계의 흐름을 중심으로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는 3조의 팀프로젝트에 있어 핵심 인물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직후의 이념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를 거쳐 1950~60년대에 6.25 전쟁 및 4.19 혁명을 피부로 경험하며 문학계에서 활약한 김수영 시인은 '자유'라는 이념을 갈망하며 정치 현실에 대한 시와 문학의 실천적인 책무를 강조한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혼란스럽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와 정치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움을 이어 나간 그의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 등의 시를 통해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과 김수영 시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시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김수영 시인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에 김수영 시인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연구 대상

김수영의 생애

김수영(金洙暎) 시인은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초기 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난해한 성향을 띄었다. 그러나 4·19를 경험하면서 그의 시는 자유의 이념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적인 비애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들을 발표했다.[2]

그는 1921년 11월 27일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다음해 김수영 일가는 종로6가로 이사했는데, 김수영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3] 그의 집은 그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시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지만, 동대문 앞의 골목길 안에는 그의 고모가 여전히 살고 있었기에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을 때도, 해방공간의 소음을 피해 숨어 있을 때도 김수영이 거처는 바로 그 동대문 앞의 골목길에 있었다. 그의 집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유력가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압력에 의해 집안 사정이 악화되었다. 장남이었던 김수영 시인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요구보다 식민 현실의 모순 앞에 똑바로 서서 견디며 삶을 지탱하는 개인이라는 과제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행에 취직해 집안을 건사해줄 것을 바랐던 부모님을 뒤로 하고, 일본에 건너가 연극에 심취하였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 시기였기에 식민 본국의 자유는 온전치 못했다. 그는 일본 본토를 향한 미국의 공격을 피해 귀국하여 연극계에서 연출 보조 등의 업무를 맡다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길림극예술연구회로 만주에서 활동하며 1945년에는 길림공화당에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 충무로로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연극에서 벗어나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의 등단작은 「묘정(廟廷)의 노래」이다. 이는 고전적 정서와 언어를 가진 시로, 등단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동양적 전통에 기반한 삶과 사유의 바탕과 정신 세계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전통적 서정에 집중하기 보다 현대적 혁신의 언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6.25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가 인민군 훈련을 받았던 김수영 시인은 민간인 억류자 신분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영어로 소통할 줄 알았기에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고, 또 수용소 병원 조무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4] 전쟁을 겪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김수영은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 셋방을 전전하다 마포구 구수동에 집을 장만하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글을 쓰며, 생활의 방편으로 닭을 키우며 지냈다. 1968년 6월 15일 밤, 김수영은 청진동의 선술집에서 문인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졌고 다음날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유해는 도봉산의 선영에 묻혔다.[5]


김수영과 자유(6.25 전쟁, 4.19 혁명)

김수영 시인의 생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대표적인 참여문학 계열 시인으로, 6.25 전쟁4.19 혁명 등을 겪으며 관련된 경험과 사유가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김수영 시인은 '자유'라는 요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Quote-left.png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직이 부를 수도 소리 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지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Quote-right.png
출처: 김수영,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먼저 6.25 전쟁의 경우, 김수영 시인은 전쟁을 겪으며 실제로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1953년에 쓰여진 「내가 겪은 포로생활」 등과 같이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던 사건을 산문으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치욕스러운 경험이 많은 김수영 시인의 개인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좌우 양쪽 진영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김수영 시인은 자유에 천착하게 되었다. 이때, 자유는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그에게 자유란, 서구 민주주의식 자유, 존재론적 자유 등 이념적, 정치적 특징에 국한된 자유라기보다는 시를 통해 꿈꿀 수 있는 자유 및 자유적인 투쟁에 집중하였다. 이는 위 시에서 잘 나타난다. 즉, 그는 시의 기본적 가치를 자유로 보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Quote-left.png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 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 갈 사람은 없다

(…)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띠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 없이

떼어 치우고

Quote-right.png
출처: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


위 시에서 나타나는 강한 어조는 4.19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검열과 억압이 강한 시대적인 상황 속 진정한 자유가 도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김수영 시인이 알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4.19 세대 시인으로도 많이 일컬어지는데, 보통 4.19 혁명 당시 김수영은 당시 이미 40살 무렵이었다. 이는 혁명의 에너지가 소진된 무렵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혁명을 사유하고 각성을 추동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4.19 세대 시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는 영어에 익숙해 통역 업무를 맡을 정도였으며 서양 사상에도 능통했다. 그는 서구의 모더니티는 기존의 규범에 대한 해체나 혁명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 가능한 것이라 보기도 하였는데, 독재정권 하에서 질서에 대한 해체가 불가능한 후진성이 나타나는 한국을 보며 이러한 후진성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 자유가 도래한 것 같았으나 계속되는 검열과 바뀌지 않는 세상에 불만을 토로하였고, 진정한 혁명은 정치, 권력, 체계의 교체만이 아닌 생활 속 자유정신의 체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는 정부에 의해서만이 아닌 신문사 내규로 자신의 시 출판이 거절되었음을 알게 되는 등의 현실을 보며 이러한 사유를 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묻어난 시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이다.[6]


시기에 따라 변모하는 김수영의 시 세계

1940년대에 김수영 시인의 시는 전통, 주체, 초현실주의라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 전통을 대표하는 시는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藝術部落)』에 게재한 그의 등단작「묘정의 노래」이다. 그의 시들은 전통을 역사적 범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역사는 그의 초기 시에서는 비판의 대상에 해당한다. 그가 1950년대 내내 과거를 부정하는 작업에 집중했던 이유가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체중심주의의 근대철학의 내용이 ‘책’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다. 이때 책의 내용은 독자가 그 내용을 상상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미국에서 건너온 책을 문제 삼고 있었는데, 미국은 조선 사람들이 가진 이해의 지평 너머에 있는 나라였다. 그 책을 주체와 연관시키는 것은, 고통스럽더라도 주체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주체 스스로 구성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의 또 하나의 요소는 미적 근대성으로서의 초현실주의적 시작 방법이다. 초현실주의는 자기부정과 현실부정의 태도를 주요 동인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정신을 그의 시 세계에 있어 하나의 기본 요인으로 삼은 것이다.

6.25 전쟁 이후 그는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속도주의로서의 근대의 완성을 추구한다. 1956년까지는 그의 정서적 지향점이 전근대적인 것에 있었다. 근대에 의해 파괴된 전근대의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준 사건이 6.25 전쟁이었으며, 그 전쟁은 곧 고통스러운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근대는 거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체험을 통해 그는 근대를 거부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고, 그 후 그는 근대를 완성함으로써 그 근대를 벗어나는 일을 삶의 방식으로 택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기부정의 정신이었다. 자신 및 현실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대인이 되어야 했고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의 속도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적 행동은 근대 자체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는 출발에서 죽는 것을 영예로 안다(「」)는 진술이나 문명을 아는 자는 그 문명을 차버린다(「미스터 리에게」)는 진술은 전쟁으로 현상한 폭력의 경험이었던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 그 근대를 완성하는 것에 있음을 자각한 후의 발언이다. 이를 실행한 김수영의 시가 과거를 부정하는 망각으로서의 모더니즘이다. 근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근대를 부정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그가 추구했던 근대 완성의 주체는 철저한 개인이었다.

개인주의적 시 세계를 넘어서는 계기를 김수영에게 준 것은 4.19 혁명의 경험이었다. 그는 4.19 혁명을 겪으며 공동체의 힘으로 근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의 시적 주체는‘우리’이다. 이를테면 시적 자아가 1950년대의 개인적 자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아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에게는 일종의 행복의 경험이었는데, 그는 곧 4.19 혁명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다시 ‘나’라는 개인의 시적 주체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혁명의 정신을 완전히 불신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정치적 혁명에는 좌절했지만 그에 대비되는 존재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의 일차적 목표가 정치에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1960년 6월 16일 그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고독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혁명은 시적 혁명이 된다. 이로부터 김수영이 지향하는 두 가지 세계가 나타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시를 통한 존재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세계이다. 이것을 주체와 대상이 명확해진 상태라고 해도 될 것이다. 둘을 합해서 말한다면 정치적 변화는 고독한 주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개인의 고독한 혁명이 개인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이 시기 김수영 시 세계의 큰 변모가 있다.

5.16 군사 쿠데타는 그에게는 다시 한번 현실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것은 그가 1950년대 내내 추구했던 속도주의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가를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역설의 경험이었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신귀거래」 연작을 통해 ‘풍자와 해탈’의 관계에 대한 획기적 인식을 보여주었는데, 풍자는 삶에의 몸담음을, 해탈은 삶으로부터의 초월을 가리키지만, 그 해탈은 풍자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그의 시는 말하고 있다. 풍자가 삶에의 몸담음이고 그 삶이 일상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가 들어간 영역은 일상이었다. 그가 일상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말을 빌리면,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의미를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일상에 집중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근대의 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삶을 철저하게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일상이 단선적이고 발전적인 역사관에 의해 선택되고 배제되는 현실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뒤엉켜 시간을 구성하는 현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대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이 공존의 역사관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일상은 어떤 단일한 목표로 수렴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 그 자체를 크게 맴돌면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7]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

Quote-left.png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그림자에 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적 기점이 된다.

Quote-right.png
출처: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시인은 그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온몸의 시학을 추구하였다. 순수-참여논쟁의 맥락 하에서 이를 살펴보면, 60년대 참여문학에 초점을 둔 시학이라고 볼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 의하면, 그는 온몸으로 부딪혀서 수행해야 하는 것시쓰기라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온몸으로 부딪히며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결합한 형태로 시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은 이러한 온몸의 시학에 기반하는 김수영 시인의 최후의 결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Quote-left.png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Quote-right.png
출처: 김수영, 「


김수영 시인이 언급한 ‘온몸’은 시작의 주체로서, 살과 뼈와 근육을 가진 실제적인 몸이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몸이다. 온몸은 비유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몸으로써 움직이고 운동하는 몸을 전제로 한다. 온몸은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미지와 혼돈의 세계를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풀은 행동과 이동이 자유로운 동물과 달리 뿌리를 박고 있는 땅에 평생을 매여 있는 식물로서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에서 수동적인 풀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능동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킨다. ‘눕다’와 ‘일어나다’ 두 동사는 ‘나부끼다’와 달리 능동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움직임인데, 여기에는 풀의 고유한 힘인 탄력과 반동력이 있다. 풀의 눕고 일어남에는 바람의 힘에 밀리는 과정과 그것에 밀리지 않으려는 탄력과 반동력의 미세하고 무수한 과정이 있는데, 이것이 떨림이며, 이 떨림이 시인의 감수성과 만나 감정적으로 변화된 것이 ‘울다’, ‘웃다’ 두 동사이다. 풀의 누움과 일어남, 울음과 웃음 등 네 가지 움직임은 바람과 동시에 생긴다. 풀이 육체에 구속된 한계와 수동성을 넘어서는 것 은 풀과 바람이 일체가 될 때이다. 바람은 풀 속에 있는 탄력과 반동력을 깨워 활동시킨다. 이 힘이 풀에게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몸과 삶의 부조리를 밀고 나가는 ‘온몸’이 되도록 한다. 풀은 바람을 육화시켜 수동성을 능동적으로 전환시키고 땅에 구속된 삶에 역동적인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풀뿌리가 눕는다”는 표현에 이르러 풀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풀잎의 운동에 그치지 않고 뿌리까지 이어지는 온몸의 운동을 보여준다. 뿌리의 움직임은 지상에서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풀잎의 움직임과 달리 팽이의 정중동의 운동, 복사씨와 살구씨에 내재된 ‘단단한 고요함’과 같이 잠재적인 움직임이다. 뿌리의 움직임에는 외부의 힘에 휘둘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단단한 고요함을 유지하는 힘, 외부의 모든 변화를 포용하고 육화시키는 풀의 작용 등이 있는데, 이 움직임은 온몸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몸’은 밀고 나가는 행동이며 움직이는 몸이므로 힘이 있고, 속도가 있다. 풀에서 그 힘과 속도는 바람보다 빨리 눕고 빨리 울며,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바람보다 빠르고 순서가 앞서는 풀의 운동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먼저 일어나는 것은 바람이 불기 전부터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탄력과 반동력이다. 그 힘은 순간 속에서 태동하여 풀의 운동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잠깐의 방심과 나태와 안정을 허용하지 않는 순간의 속도와 힘은 팽이 이미지나 폭포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팽이의 ‘스스로 도는 힘’에는 방심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순간의 운동이 있으며 곧은 소리로 두려움 없이 떨어지는 폭포에도 나태와 안정을 뒤집는 엄격한 순간의 힘과 속도가 있다. 순간에서 배태된 힘과 속도가 풀의 운동에 긴장감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순간의 윤리는 새로운 문학의 모험을 위해 침을 뱉자고 하거나 눈에 대고 기침하자는 요청에도 나타난다. 침 뱉기와 기침에는 분절된 언어를 통한 의미 부여나 설명은 없으나 그보다 강력한 힘과 속도가 있으며 그것을 배태하는 순간의 윤리가 있다. 시 쓰는 주체로서의 온몸은 힘과 속도와 순간의 윤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시와 삶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사랑이며 시의 형식인 것이다.

그는 풀을 움직이는 몸, 행동하는 주체로서 관찰하였으며, 그 몸과 움직임에서 탄력과 반동력을 발견하고 능동적인 의지를 이끌어냈다. 그때 풀은 바람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육화하여 능동적인 힘으로 전환시키고 그 힘으로 자신이 처한 삶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존재가 된다. 그 움직임과 행동에는 방심과 나태를 허용하지 않는 순간의 윤리가 있으며 그것이 풀의 몸과 삶과 운명에 역동적인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은 온몸의 시학이 탁월하게 적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8]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해 알 수 있듯, 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라고 여긴다. 여기서의 “온몸”은 연대를 통해 하나가 된 풀일 것이다. 그리고 이 풀이 “밀고 나가” 마침내 도달할 곳은 거세게 날뛰고 있는 동풍의 “온몸”일 것이다.[9]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김해는 오천칠군자인 김부의의 아들이다. 그는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그 후에 동료가 사초를 불태운 것에 연루되어 면직 당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김해는 안동 예안의 의병장, 안동열읍향병의 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1593년 3월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해는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를 썼다. 임진왜란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성일의 격문에 영향을 받아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김성일의 격문에 대한 김해의 답장을 통해 당시 의병의 열악한 환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김해의 문집으로는 근시재집이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기록인 난중잡록에도 김해에 대하여 적혀있다.

김해의 묘는 안동의 금학산에 있으며, 김해는 안동 관산김씨의 입향조인 김효로와 함께 광산김씨 재사에 제향되어 있다.


김해에 대한 시맨틱데이터를 구축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김해가 도대장으로 지휘한 안동열읍향병이 일본군의 주둔지인 당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철수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데이터로 표현할 지였다. 시맨틱데이터는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김해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노드인 안동열읍향병를 김해와 연결하였다. 이 둘의 관계의 attribute에 도대장이라는 것을 표현하니 관계가 좀더 명확화되었다. 그리고 안동열읍향병이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이 관계성을 나타내는 데에 이루다가 아닌 ‘이끌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많이 고민하였는데, 이끈다는 관계어를 사용하면 의병-김해 및 안동열읍향병-김해, 안동열읍향병-왜군 격파의 관계들이 모두 이끈다는 관계어로 표현 가능하게 되므로 도리어 관계가 불분명해진다고 생각되어 관계어를 두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당교라는 지역을 노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당교라는 지역 노드가 다른 노드와는 연결되기 어려웠고 더 나아가 당교 외 다른 지역명 노드가 발생되기도 어려웠으며, 또한 당교의 왜군 격파 및 철수 노드에 remark를 통해 당교가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음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과 그 다음 달에 일어난 사초를 불태운 일 사이의 연관관계를 끝내 알아낼 수 없어서, 이 두 노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랜시간 고민하였다. 그러나 시맨틱데이터는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정설로 여겨지는 사항이나 학설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사실이 아닌 나의 단순한 추측은 데이터로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객관적 사실인 이 두 사건의 선-후 관계만 기재하였다. 데이터를 다 만들고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로 결과물을 보니까, 영향을 주었다, 혹은 이유와 결과라는 등의 관계를 기재하지 않음으로써 이 두 사건의 연관관계를 학술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형태가 되어서 도리어 내가 사용한 선-후 관계어가 이 두 노드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자료

이미지



논문 및 문헌



신문기사 및 사이트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