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팀프로젝트 3조 소재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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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는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과 세 차례의 독재를 거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언어를 활용하는 시는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로 하여금 통찰을 체험하게 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거나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시의 특징에 의하면, 시를 통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문학계에는 대립구도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순수문학과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을 포함한 삶을 위한 문학을 지향하며 현실 반영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 참여문학을 두 축으로 가졌다. | 3조는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과 세 차례의 독재를 거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언어를 활용하는 시는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로 하여금 통찰을 체험하게 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거나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시의 특징에 의하면, 시를 통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문학계에는 대립구도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순수문학과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을 포함한 삶을 위한 문학을 지향하며 현실 반영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 참여문학을 두 축으로 가졌다. | ||
| − | 이때 김수영 | + | 이때 <big>'''김수영''' 시인</big>은 참여문학을 주장하였던 인물로, 1968년에 순수문학 계열의 이어령 시인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에 이어령 시인은 참여론의 확대를 우려하며 순수문학의 위치를 제시하였는데, 김수영 시인은 이러한 이어령 시인의 논지에 반기를 들며 강한 검열이 이루어짐에 따라 현실참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비판하였다.<ref>- 한혜린, 문학이란무엇인가 3차시 강의자료 <문학과 사회/삶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p.24</ref> 이렇듯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기에 순수시와 참여시라는 문학계의 흐름을 중심으로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는 3조의 팀프로젝트에 있어 핵심 인물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직후의 이념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를 거쳐 1950~60년대에 6.25 전쟁 및 4.19 혁명을 피부로 경험하며 문학계에서 활약한 김수영 시인은 '자유'라는 이념을 갈망하며 정치 현실에 대한 시와 문학의 실천적인 책무를 강조한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혼란스럽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와 정치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움을 이어 나간 그의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 등의 시를 통해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과 김수영 시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시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김수영 시인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에 김수영 시인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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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대상 == | == 연구 대상 == | ||
| − | === | + | === 김수영의 생애 === |
| − | + | 김수영(金洙暎) 시인은 1921년 11월 27일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다음해 김수영 일가는 종로6가로 이사했는데, 김수영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ref>-https://ncms.nculture.org/local-artist/story/1115</ref> 그의 집은 그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시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지만, 동대문 앞의 골목길 안에는 그의 고모가 여전히 살고 있었기에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을 때도, 해방공간의 소음을 피해 숨어 있을 때도 김수영이 거처는 바로 그 동대문 앞의 골목길에 있었다. 그의 집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유력가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압력에 의해 집안 사정이 악화되었다. 장남이었던 김수영 시인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요구보다 식민 현실의 모순 앞에 똑바로 서서 견디며 삶을 지탱하는 개인이라는 과제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행에 취직해 집안을 건사해줄 것을 바랐던 부모님을 뒤로 하고, 일본에 건너가 연극에 심취하였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 시기였기에 식민 본국의 자유는 온전치 못했다. 그는 일본 본토를 향한 미국의 공격을 피해 귀국하여 연극계에서 연출 보조 등의 업무를 맡다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길림극예술연구회로 만주에서 활동하며 1945년에는 길림공화당에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 충무로로 다시 귀국하게 된다. | |
| − | + | 귀국 이후 그는 연극에서 벗어나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의 등단작은 「'''묘정(廟廷)의 노래'''」이다. 이는 고전적 정서와 언어를 가진 시로, 등단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동양적 전통에 기반한 삶과 사유의 바탕과 정신 세계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전통적 서정에 집중하기 보다 현대적 혁신의 언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6.25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가 인민군 훈련을 받았던 김수영 시인은 민간인 억류자 신분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영어로 소통할 줄 알았기에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고, 또 수용소 병원 조무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ref>-https://nzine.kpipa.or.kr/sub/inside.php?ptype=view&idx=462&page=$page&code=inside</ref> 전쟁을 겪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김수영은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 셋방을 전전하다 마포구 구수동에 집을 장만하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글을 쓰며, 생활의 방편으로 닭을 키우며 지냈다. 1968년 6월 15일 밤, 김수영은 청진동의 선술집에서 문인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졌고 다음날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유해는 도봉산의 선영에 묻혔다.<ref>-https://ncms.nculture.org/local-artist/story/1115</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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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전개된 1950년대의 그의 문학은 후진적 한국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기도 했다. 1950년대 내내 김수영의 시를 사로잡은 주제는 현대를 향한 고통이 참담할지라도 그것을 건너 새로운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시는 뒤떨어진 한국 현실의 설움에 대한 것이었고, 현대적 창조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를 위해 거듭나야 하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근대를 아는 사람만이 근대를 차버릴 수 있다고 시에 쓰기도 했다. 이 자기 혁명의 정신이야말로 그의 1950년대 모더니즘의 근간이었다. 김수영은 그것을 초현실주의의 정신이라고,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의 시가 다른 모더니스트들의 언어 미학적 경향과 달리 사회적 발언으로 확장된 것은 그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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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60년의 4·19는 김수영의 정신을 혁명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시의 혁명가였고 정치의 비판자였다. 허정 과도내각을 향해 혁명을 팔아먹은 집단이라고 외쳤고, 2공화국을 자신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혁명은 절대적 변화의 지평까지 진척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4·19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을 때 그의 시는 소시민성의 비겁을 폭로하는 쪽으로 언어의 방향을 틀었다. 그는 자신의 비겁을 폭로하여 사회 전체를 성찰하고 그로써 다시 생성될 세계를 예감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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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5일 (목) 14:48 판
| 3조 인물 정보 | |
|---|---|
김수영 시인 (연합뉴스 '문인들의 우상' 김수영 시인 50주기…문학·삶 복원) | |
| 이름 | 김수영 |
| 생년 | 1921년 |
| 몰년 | 1968년 |
| 국적 | 대한민국 |
| 계열 | 참여시 |
| 호 | 미상 |
| 유형 | 시인 |
연구목적 및 필요성
3조는 시를 통해 광복 이후 6.25 전쟁과 세 차례의 독재를 거친 험난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언어를 활용하는 시는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로 하여금 통찰을 체험하게 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거나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시의 특징에 의하면, 시를 통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문학계에는 대립구도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순수문학과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을 포함한 삶을 위한 문학을 지향하며 현실 반영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 참여문학을 두 축으로 가졌다.
이때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주장하였던 인물로, 1968년에 순수문학 계열의 이어령 시인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에 이어령 시인은 참여론의 확대를 우려하며 순수문학의 위치를 제시하였는데, 김수영 시인은 이러한 이어령 시인의 논지에 반기를 들며 강한 검열이 이루어짐에 따라 현실참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비판하였다.[1] 이렇듯 김수영 시인은 참여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기에 순수시와 참여시라는 문학계의 흐름을 중심으로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하는 3조의 팀프로젝트에 있어 핵심 인물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직후의 이념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를 거쳐 1950~60년대에 6.25 전쟁 및 4.19 혁명을 피부로 경험하며 문학계에서 활약한 김수영 시인은 '자유'라는 이념을 갈망하며 정치 현실에 대한 시와 문학의 실천적인 책무를 강조한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혼란스럽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와 정치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움을 이어 나간 그의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씨개로 하자」 등의 시를 통해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과 김수영 시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시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김수영 시인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에 김수영 시인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연구 대상
김수영의 생애
김수영(金洙暎) 시인은 1921년 11월 27일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다음해 김수영 일가는 종로6가로 이사했는데, 김수영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2] 그의 집은 그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시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지만, 동대문 앞의 골목길 안에는 그의 고모가 여전히 살고 있었기에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을 때도, 해방공간의 소음을 피해 숨어 있을 때도 김수영이 거처는 바로 그 동대문 앞의 골목길에 있었다. 그의 집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유력가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압력에 의해 집안 사정이 악화되었다. 장남이었던 김수영 시인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요구보다 식민 현실의 모순 앞에 똑바로 서서 견디며 삶을 지탱하는 개인이라는 과제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행에 취직해 집안을 건사해줄 것을 바랐던 부모님을 뒤로 하고, 일본에 건너가 연극에 심취하였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 시기였기에 식민 본국의 자유는 온전치 못했다. 그는 일본 본토를 향한 미국의 공격을 피해 귀국하여 연극계에서 연출 보조 등의 업무를 맡다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길림극예술연구회로 만주에서 활동하며 1945년에는 길림공화당에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 충무로로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연극에서 벗어나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의 등단작은 「묘정(廟廷)의 노래」이다. 이는 고전적 정서와 언어를 가진 시로, 등단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동양적 전통에 기반한 삶과 사유의 바탕과 정신 세계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전통적 서정에 집중하기 보다 현대적 혁신의 언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6.25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가 인민군 훈련을 받았던 김수영 시인은 민간인 억류자 신분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영어로 소통할 줄 알았기에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고, 또 수용소 병원 조무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3] 전쟁을 겪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김수영은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 셋방을 전전하다 마포구 구수동에 집을 장만하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글을 쓰며, 생활의 방편으로 닭을 키우며 지냈다. 1968년 6월 15일 밤, 김수영은 청진동의 선술집에서 문인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졌고 다음날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유해는 도봉산의 선영에 묻혔다.[4]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전개된 1950년대의 그의 문학은 후진적 한국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기도 했다. 1950년대 내내 김수영의 시를 사로잡은 주제는 현대를 향한 고통이 참담할지라도 그것을 건너 새로운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시는 뒤떨어진 한국 현실의 설움에 대한 것이었고, 현대적 창조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를 위해 거듭나야 하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근대를 아는 사람만이 근대를 차버릴 수 있다고 시에 쓰기도 했다. 이 자기 혁명의 정신이야말로 그의 1950년대 모더니즘의 근간이었다. 김수영은 그것을 초현실주의의 정신이라고,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의 시가 다른 모더니스트들의 언어 미학적 경향과 달리 사회적 발언으로 확장된 것은 그 때문이다.
1960년의 4·19는 김수영의 정신을 혁명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시의 혁명가였고 정치의 비판자였다. 허정 과도내각을 향해 혁명을 팔아먹은 집단이라고 외쳤고, 2공화국을 자신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혁명은 절대적 변화의 지평까지 진척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4·19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을 때 그의 시는 소시민성의 비겁을 폭로하는 쪽으로 언어의 방향을 틀었다. 그는 자신의 비겁을 폭로하여 사회 전체를 성찰하고 그로써 다시 생성될 세계를 예감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김해가 남긴 것
김해는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향병일기』[5]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임란사 및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는 문집으로 『근시재집(近始齋集)』(4권)이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입향조인 김효로(金孝盧, 1445∼1534)를 모시는 광산김씨 사당에 김해도 함께 모셔지고 있다. 김해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금학산(金鶴山)에 있으며, 1893년 이조판서에 추증[6]되었다.
김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난중잡록(亂中雜錄)[7]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8]
김해는 어떤 마음으로 의병활동을 했을까?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동 역시 이 격문에 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고,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이 답장을 통해 여러 군사적 환경이 심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적에 대한 분개심으로 일어났고, 김해 또한 같은 마음으로 다짐하며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9]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김해는 오천칠군자인 김부의의 아들이다. 그는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그 후에 동료가 사초를 불태운 것에 연루되어 면직 당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김해는 안동 예안의 의병장, 안동열읍향병의 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1593년 3월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해는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를 썼다. 임진왜란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성일의 격문에 영향을 받아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김성일의 격문에 대한 김해의 답장을 통해 당시 의병의 열악한 환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김해의 문집으로는 근시재집이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기록인 난중잡록에도 김해에 대하여 적혀있다.
김해의 묘는 안동의 금학산에 있으며, 김해는 안동 관산김씨의 입향조인 김효로와 함께 광산김씨 재사에 제향되어 있다.
김해에 대한 시맨틱데이터를 구축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김해가 도대장으로 지휘한 안동열읍향병이 일본군의 주둔지인 당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철수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데이터로 표현할 지였다. 시맨틱데이터는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김해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노드인 안동열읍향병를 김해와 연결하였다. 이 둘의 관계의 attribute에 도대장이라는 것을 표현하니 관계가 좀더 명확화되었다. 그리고 안동열읍향병이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이 관계성을 나타내는 데에 이루다가 아닌 ‘이끌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많이 고민하였는데, 이끈다는 관계어를 사용하면 의병-김해 및 안동열읍향병-김해, 안동열읍향병-왜군 격파의 관계들이 모두 이끈다는 관계어로 표현 가능하게 되므로 도리어 관계가 불분명해진다고 생각되어 관계어를 두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당교라는 지역을 노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당교라는 지역 노드가 다른 노드와는 연결되기 어려웠고 더 나아가 당교 외 다른 지역명 노드가 발생되기도 어려웠으며, 또한 당교의 왜군 격파 및 철수 노드에 remark를 통해 당교가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음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과 그 다음 달에 일어난 사초를 불태운 일 사이의 연관관계를 끝내 알아낼 수 없어서, 이 두 노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랜시간 고민하였다. 그러나 시맨틱데이터는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정설로 여겨지는 사항이나 학설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사실이 아닌 나의 단순한 추측은 데이터로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객관적 사실인 이 두 사건의 선-후 관계만 기재하였다. 데이터를 다 만들고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로 결과물을 보니까, 영향을 주었다, 혹은 이유와 결과라는 등의 관계를 기재하지 않음으로써 이 두 사건의 연관관계를 학술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형태가 되어서 도리어 내가 사용한 선-후 관계어가 이 두 노드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자료
이미지
- 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 출처: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해 문집인 『근시재집』제3권에 실린 김성일 격문에 답하는 편지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논문 및 문헌
신문기사 및 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김해"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
- 네이버 지식백과 - 국역 국조인물고, "김해"
-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 경북일보, "조선충절실록) 13. 안동열읍향병대장 김해"(2023-10-10, 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주석
- ↑ - 한혜린, 문학이란무엇인가 3차시 강의자료 <문학과 사회/삶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p.24
- ↑ -https://ncms.nculture.org/local-artist/story/1115
- ↑ -https://nzine.kpipa.or.kr/sub/inside.php?ptype=view&idx=462&page=$page&code=inside
- ↑ -https://ncms.nculture.org/local-artist/story/1115
-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
- ↑ 사망 후 품계 또는 직급을 높이거나 관직을 내리는 것
- ↑ 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 ↑ 亂中雜錄[二] 壬辰下
- ↑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