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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_사건_정보
 
{{5조_사건_정보
|이름= 홀로코스트(Holoca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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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홀로코스트
|시기= 1933~1945 년
 
 
|사건 유형= 제노사이드
 
|사건 유형= 제노사이드
|국적=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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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일= 1933년
|가해 국가= 나치 독일 정권 및 협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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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일= 1945년 5월
|피해 대상= 유대인, 동성애자, 유색인종, 슬라브족, 집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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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국가= 독일 나치 정권, 협력국
|발생 이유=반 유대주의 [2025-1_디지털_인문학이란_무엇인가|{{Clickable button|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color=#e5e9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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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600만 유대인 학살
[[2025-1:팀프로젝트_위키페이지_5조|{{Clickable button|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5조 위키페이지|color=#e5e9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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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설명= 1945년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https://www.yna.co.kr/view/AKR2015012603710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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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목적 및 필요성 ==
 
== 연구목적 및 필요성 ==
우리 5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직했던 동족 살인인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선정하였다.[[2025-1:팀프로젝트_위키페이지_5조| 특히 홀로코스트와 예술작품]]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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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5조는 역사상 가장 끔직했던 인종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선정하였다. 단순히 사건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사건과 관련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도 함께 살펴보면서 [[2025-1:팀프로젝트_위키페이지_5조| 홀로코스트 역사: 실증적 분석과 예술적 재현]]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정부의 인종대학살, 인종 대청소라 불리며 오랜 기간 유대인을 향해 이루어졌던 무차별적인 살인이다.그러나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자국의 일제강점기 시절과 겹치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비중이 적다보니 학습이 덜 되어있는 것 같다.  
 
  
또한 김해가 지휘한 대규모 의병부대인 안동열읍향병은 당교를 집중공격하여 일본군을 철수시킨 성과가 있다. 이는 안동열읍향병이 명망 사족들의 연합부대 성격을 지닌 덕분에 관군 지휘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관군이 지닌 병력과 무기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43851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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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교육과정에서 홀로코스트를 가르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시기상 겹치는 일제강점기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고, 우리 인종이 연루된 사건이 아니다 보니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나 지식이 타국가나 인종에 비해 비교적 낮은 것 같다.
  
이처럼 김해를 중심으로 향병일기, 행군수지 등 임진왜란 당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있는 다양한 문헌과 예안의병 및 안동열읍향병을 기반으로 경북지역의 의병사를 연구할 수 있어 김해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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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비슷하게 가슴 아픈 역사를 겪였기에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어느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하고 추모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에 딱딱하게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한 글자 씩 마음을 담아 작성해 연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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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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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Holocaust) 때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고 부르기도 한다. <ref>[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introduction-to-the-holocaust 홀로코스트 백과사전]</ref>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 정권이 그들의 동맹국과 함께 조직적, 제도적으로 유럽계 유대인들 외 다수를 탄압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의 시작과 2차대전때 나치가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홀로코스트는 그 잔인한 막을 내리게 된다.
  
== 연구 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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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이유==
=== 김해의 생애 ===
+
<반유대주의>
김해(金垓,1555∼1593)는 오천칠군자<ref>오천의 덕망 높은 일곱 선비</ref> 중 하나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아들로,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1589년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11월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96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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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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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VU8NKab-sI?si=81egvbSsv-spi7Qs"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고향에서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란 초기부터 안동 예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대다수의 군현을 포괄한 대단위 부대, 안동열읍향병이 결성된 이후에는 안동열읍향병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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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center>
 
+
이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증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이는 나치가 집권할 당시 지배적으로 쓰였던 이데올로기이며,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원인조차 유대인으로 돌렸고, 독일의 다른 위기와 문제들 역시 유대인들의 탓을 하였다.
1593년 안동열읍향병은 관군과 힘을 합하여 일본군의 핵심주둔지인 당교를 집중공격하여 일본군을 철수시켰고<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43851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ref>, 김해는 계속 적을 추격하다가 밀양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경주로 이동한 후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 김해가 남긴 것 ===
 
김해는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향병일기|『향병일기』]]<ref>[http://aks.ai/GC02401098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ref>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임란사 및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는 문집으로 『근시재집(近始齋集)』(4권)이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입향조인 김효로(金孝盧, 1445∼1534)를 모시는 광산김씨 사당에 김해도 함께 모셔지고 있다. 김해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금학산(金鶴山)에 있으며, 1893년 이조판서에 추증<ref>사망 후 품계 또는 직급을 높이거나 관직을 내리는 것</ref>되었다.
+
나치당은 따라서 독일 게르만 민족을 유대인 민족과 차별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아리아인"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인종의 민족이라 주장하였고, 반대로 유대인 인종은 가장 열등하고 위험하다고 제창하였다.
  
=== 김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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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
파일:난중잡록김해.jpg|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V006_067A_IMG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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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뉘렌베르크 인종법_PJY.jpg|독일인 혈통, 혼혈,유대인의 등급로 나눈 도표([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introduction-to-the-holocaust])
 
</gallery>
 
</gallery>
 
+
==당시 사회적 분위기==
난중잡록(亂中雜錄)<ref>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ref>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ref>亂中雜錄[] 壬辰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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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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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하였다.
===김해는 어떤 마음으로 의병활동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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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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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영토 상실, 군사력 제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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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건은 독일 국민에게 큰 굴욕감과 불만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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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혼란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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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좌절감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우며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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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동안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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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점령 등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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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지 않고 유화정책으로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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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독일은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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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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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와 태평양,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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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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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s://chatgpt.com/c/683062a5-96f8-8013-940e-fac5572a845c Text generated by ChatGPT(2025-05-23 생성, GPT-4o), OpenAI.]</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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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학봉집격문.jpg|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40_040_0010_2004_001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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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히틀러_PJY.jpg|히틀러와 나치([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67531.html])
파일:김해격문답편.jpg|김해 문집인 『근시재집』제3권에 실린 김성일 격문에 답하는 편지([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730A_0050_010_0360_2010_B009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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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동 역시 이 격문에 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고,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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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혼란 속에서 탄생한 극우 전체주의 이념이다.이 틈을 타 급진적인 정치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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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가 바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 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었다.히틀러는 강한 리더십과 선동적인 연설을 통해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반공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다.그는 독일의 영광 회복과 인종적 순수성을 주장하며 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였다.1923년 뮌헨 폭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히틀러는 이후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하며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다.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독일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나치당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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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히틀러는 총리에 임명되었고, 이후 독재 체제를 수립하며 나치즘을 독일의 국가 이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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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s://chatgpt.com/c/683062a5-96f8-8013-940e-fac5572a845c Text generated by ChatGPT(2025-05-23 생성, GPT-4o), OpenAI.]</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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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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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들은 유대인이다.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는데, 270만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대량 총살 작전과 관련 학살에 살해되었다.800,000~1,000,000명의 유대인이 게토, 노동 및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수용소와 게토 외부에서 벌어진 폭력 행위로 최소 250,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인용문|
 
{{인용문|
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br/>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br/>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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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우리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갔다. 어느 일요일 아침, 지역의 유태인들이 잡혀갔다.
|출처 = 김해,<근시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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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프로초비세로 행진하면서 들어가고 있을 때 2구의 시신 옆에 서 있던 폴란드 경찰이 나에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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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 옴에 따라 그는 총을 장전하고 나에게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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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지나갈 때 그는 물통으로 나를 갈겨서 내 코와 턱을 뭉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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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열해서 이탈되어 자리를 잃어 버렸다. 경찰은 다른 사람은 사살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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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후에 아버지와 나는 프로코심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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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코브 바서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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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치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역시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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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전쟁 포로는 약 330만명,비유대인 폴란드인 약 180만명, 롬인 남성, 여성, 어린이 및 경멸하게 "집시"로 분류된 사람은 최소 250,000명, 최대 500,000명,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당국에 의해 살해된 세르비아 민간인은 310,000명 이상, 기관 및 보호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최소 10,0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250,000~300,000명, 독일의 정치적 정적 및 반대자 수만 명,"상습범"이나 "반사회적"로 분류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독일인 약 35,000명,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거나 독일군 복무를 거부한 이유로 처형당한 여호와의 증인 약 1,700명,동성애/양성애 남성,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 남성 수백 명, 수천 명, 독일의 흑인 알 수 없음(수백명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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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비유대인들을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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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이 답장을 통해 여러 군사적 환경이 심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적에 대한 분개심으로 일어났고, 김해 또한 같은 마음으로 다짐하며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ref>[https://story.ugyo.net/front/sub04/sub0402.do?chkBackId=E_KYH_8162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ref>
+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패배하면서 끝이 났다. 연합군들은 수용소들의수감자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된 후에도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맞서야했으며 실종된 가족들을 찾느라 수년간 헤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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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결과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들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삶을 다시 재건시키는데 큰 제한을 두기도 하여, 일부 유대인들은 난민 수용소에서 삶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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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
 
==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
* [[6조_이효림_김해.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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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조_박제영_홀로코스트.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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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Graph | title=5조_박제영_홀로코스트.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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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결과 ==
 
== 연구결과 ==
김해는 오천칠군자인 김부의의 아들이다. 그는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그 후에 동료가 사초를 불태운 것에 연루되어 면직 당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김해는 안동 예안의 의병장, 안동열읍향병의 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1593년 3월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
이번 시멘틱 데이터를 구축할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중심이 되는 홀로코스트사건을 어떠한 연결어로 연결시킬 것인가 였다. 모든 키워드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중심어로 연결이 되지만, 또 키워들 사이끼리의 유기성 역시 고려하지 않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멘틱 데이터를 만들기 전에 수업시간에 했던 실습을 참고하여 수기로 그려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먼저 그려보니 막상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복잡한 키워드도 있었고, 더 단순한 키워드도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시멘틱 데이터로 옮기니 더 깔끔하고 정제된 상태로 만들어진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가설명 등을 통해 키워드들을 퍼트려 나가고 싶은데 시간과 나의 위키문법 활용 제약 때문에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김해는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를 썼다. 임진왜란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성일의 격문에 영향을 받아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김성일의 격문에 대한 김해의 답장을 통해 당시 의병의 열악한 환경을 조금이나마 알 있다.
 
 
 
김해의 문집으로는 근시재집이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기록인 난중잡록에도 김해에 대하여 적혀있다.
 
 
 
김해의 묘는 안동의 금학산에 있으며, 김해는 안동 관산김씨의 입향조인 김효로와 함께 광산김씨 재사에 제향되어 있다.
 
 
 
 
 
김해에 대한 시맨틱데이터를 구축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김해가 도대장으로 지휘한 안동열읍향병이 일본군의 주둔지인 당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철수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데이터로 표현할 지였다. 시맨틱데이터는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김해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노드인 안동열읍향병를 김해와 연결하였다. 이 둘의 관계의 attribute에 도대장이라는 것을 표현하니 관계가 좀더 명확화되었다. 그리고 안동열읍향병이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이 관계성을 나타내는 데에 이루다가 아닌 ‘이끌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많이 고민하였는데, 이끈다는 관계어를 사용하면 의병-김해 및 안동열읍향병-김해, 안동열읍향병-왜군 격파의 관계들이 모두 이끈다는 관계어로 표현 가능하게 되므로 도리어 관계가 불분명해진다고 생각되어 관계어를 두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당교라는 지역을 노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당교라는 지역 노드가 다른 노드와는 연결되기 어려웠고 나아가 당교 외 다른 지역명 노드가 발생되기도 어려웠으며, 또한 당교의 왜군 격파 및 철수 노드에 remark를 통해 당교가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음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과 그 다음 달에 일어난 사초를 불태운 일 사이의 연관관계를 끝내 알아낼 수 없어서, 이 두 노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랜시간 고민하였다. 그러나 시맨틱데이터는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정설로 여겨지는 사항이나 학설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사실이 아닌 나의 단순한 추측은 데이터로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객관적 사실인 이 두 사건의 선-후 관계만 기재하였다. 데이터를 다 만들고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로 결과물을 보니까, 영향을 주었다, 혹은 이유와 결과라는 등의 관계를 기재하지 않음으로써 이 두 사건의 연관관계를 학술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형태가 되어서 도리어 내가 사용한 선-후 관계어가 이 두 노드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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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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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 출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V006_067A_IMG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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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인 혈통, 혼혈,유대인의 등급로 나눈 도표 - 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introduction-to-the-holocaust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 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 - 출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40_040_0010_2004_001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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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와 나치 - 출처:
* 김해 문집인 『근시재집』제3권에 실린 김성일 격문에 답하는 편지 - 출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730A_0050_010_0360_2010_B009_X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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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67531.html 한겨레 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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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및 문헌 ===
 
=== 논문 및 문헌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43851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
+
* 임지현. (2016). 전지구적 기억공간과 희생자의식-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스탈린주의테러의 기억은 어떻게 만나는가? -. 대구사학, 125(0), 385-417. 10.17751/DHR.125.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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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기사 및 사이트 ===
 
=== 신문기사 및 사이트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96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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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introduction-to-the-holocaust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
* [http://aks.ai/GC02401337 디지털안동문화대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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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VU8NKab-sI?si=NdzdI8XQyrIIjjX2 희대의 악마 히틀러의 만행]
* [http://aks.ai/GC02401098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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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B9%98%EC%A6%98 나치즘 위키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5973&cid=62132&categoryId=62132 네이버 지식백과 - 국역 국조인물고, "김해"]
+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documenting-numbers-of-victims-of-the-holocaust-and-nazi-persecution 나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해했는가?-홀로코스트 박물관]
* [https://story.ugyo.net/front/sub04/sub0402.do?chkBackId=E_KYH_8162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3994 경북일보, "조선충절실록) 13. 안동열읍향병대장 김해"(2023-10-10, 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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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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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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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박제영]]  
[[분류:2025-1_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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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4일 (토) 11:16 기준 최신판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5조 위키페이지







5조 - 홀로코스트







연구목적 및 필요성

우리 5조는 역사상 가장 끔직했던 인종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선정하였다. 단순히 사건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사건과 관련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도 함께 살펴보면서 홀로코스트 역사: 실증적 분석과 예술적 재현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교육과정에서 홀로코스트를 가르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시기상 겹치는 일제강점기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고, 우리 인종이 연루된 사건이 아니다 보니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나 지식이 타국가나 인종에 비해 비교적 낮은 것 같다.

우리가 비슷하게 가슴 아픈 역사를 겪였기에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어느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하고 추모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에 딱딱하게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한 글자 씩 마음을 담아 작성해 연구해보고자 한다.



홀로코스트란

홀로코스트(Holocaust) 때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고 부르기도 한다. [1]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 정권이 그들의 동맹국과 함께 조직적, 제도적으로 유럽계 유대인들 외 다수를 탄압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의 시작과 2차대전때 나치가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홀로코스트는 그 잔인한 막을 내리게 된다.

발생 이유

<반유대주의>

이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증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이는 나치가 집권할 당시 지배적으로 쓰였던 이데올로기이며,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원인조차 유대인으로 돌렸고, 독일의 다른 위기와 문제들 역시 유대인들의 탓을 하였다.

나치당은 따라서 독일 게르만 민족을 유대인 민족과 차별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아리아인"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인종의 민족이라 주장하였고, 반대로 유대인 인종은 가장 열등하고 위험하다고 제창하였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

<제 2차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하였다. 이 전쟁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있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영토 상실, 군사력 제한을 겪었다. 이러한 조건은 독일 국민에게 큰 굴욕감과 불만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부상하였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좌절감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우며 지지를 얻었다. 1930년대 동안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확장하였다. 또한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점령 등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지 않고 유화정책으로 대응하였다. 1939년 독일은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와 태평양,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결국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다. [2]

<나치즘> 나치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혼란 속에서 탄생한 극우 전체주의 이념이다.이 틈을 타 급진적인 정치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 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었다.히틀러는 강한 리더십과 선동적인 연설을 통해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반공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다.그는 독일의 영광 회복과 인종적 순수성을 주장하며 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였다.1923년 뮌헨 폭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히틀러는 이후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하며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다.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독일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나치당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1933년 히틀러는 총리에 임명되었고, 이후 독재 체제를 수립하며 나치즘을 독일의 국가 이념으로 만들었다. [3]

희생자들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들은 유대인이다.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는데, 270만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대량 총살 작전과 관련 학살에 살해되었다.800,000~1,000,000명의 유대인이 게토, 노동 및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수용소와 게토 외부에서 벌어진 폭력 행위로 최소 250,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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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우리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갔다. 어느 일요일 아침, 지역의 유태인들이 잡혀갔다.

우리가 프로초비세로 행진하면서 들어가고 있을 때 2구의 시신 옆에 서 있던 폴란드 경찰이 나에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 옴에 따라 그는 총을 장전하고 나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내가 지나갈 때 그는 물통으로 나를 갈겨서 내 코와 턱을 뭉개버렸다. 나는 대열해서 이탈되어 자리를 잃어 버렸다. 경찰은 다른 사람은 사살했던 것이었다. 4일 후에 아버지와 나는 프로코심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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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코브 바서만 증언


그런데 나치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역시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소련군 전쟁 포로는 약 330만명,비유대인 폴란드인 약 180만명, 롬인 남성, 여성, 어린이 및 경멸하게 "집시"로 분류된 사람은 최소 250,000명, 최대 500,000명,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당국에 의해 살해된 세르비아 민간인은 310,000명 이상, 기관 및 보호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최소 10,0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250,000~300,000명, 독일의 정치적 정적 및 반대자 수만 명,"상습범"이나 "반사회적"로 분류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독일인 약 35,000명,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거나 독일군 복무를 거부한 이유로 처형당한 여호와의 증인 약 1,700명,동성애/양성애 남성,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 남성 수백 명, 수천 명, 독일의 흑인 알 수 없음(수백명 추정) 의 비유대인들을 살해하였다.

결과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패배하면서 끝이 났다. 연합군들은 수용소들의수감자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된 후에도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맞서야했으며 실종된 가족들을 찾느라 수년간 헤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결과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들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삶을 다시 재건시키는데 큰 제한을 두기도 하여, 일부 유대인들은 난민 수용소에서 삶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이번 시멘틱 데이터를 구축할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중심이 되는 홀로코스트사건을 어떠한 연결어로 연결시킬 것인가 였다. 모든 키워드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중심어로 연결이 되지만, 또 키워들 사이끼리의 유기성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멘틱 데이터를 만들기 전에 수업시간에 했던 실습을 참고하여 수기로 그려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먼저 그려보니 막상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복잡한 키워드도 있었고, 더 단순한 키워드도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시멘틱 데이터로 옮기니 더 깔끔하고 정제된 상태로 만들어진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가설명 등을 통해 키워드들을 더 퍼트려 나가고 싶은데 시간과 나의 위키문법 활용 제약 때문에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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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논문 및 문헌

  • 임지현. (2016). 전지구적 기억공간과 희생자의식-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스탈린주의테러의 기억은 어떻게 만나는가? -. 대구사학, 125(0), 385-417. 10.17751/DHR.125.385




신문기사 및 사이트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