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2025-1:팀프로젝트 5조 양성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Jamie's DH Wiki

36번째 줄: 36번째 줄:
  
 
== 연구 대상 ==
 
== 연구 대상 ==
===아우슈비츠 개요===
+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
 
 
<html><center>
 
<html><center>
 
<iframe width="855" height="481" src="https://www.youtube.com/embed/zXAJo-GhbKE" title="인간의 잔혹함의 끝,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855" height="481" src="https://www.youtube.com/embed/zXAJo-GhbKE" title="인간의 잔혹함의 끝,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42번째 줄: 43번째 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으로,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들은 모두 수감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으로,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들은 모두 수감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다.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집단 수용소의 감독부 산하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941년부터 1942년 3월까지 집단 수용소 감독부는 SS 본부의 산하기관 및 SS 작전 본부 산하기관이었다. 1942년 3월부터 아우슈비츠가 해방될 때까지 감독부는 SS 경제-관리 부처의 산하기관이었다.<ref>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아우슈비츠</ref>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집단 수용소의 감독부 산하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941년부터 1942년 3월까지 집단 수용소 감독부는 SS 본부의 산하기관 및 SS 작전 본부 산하기관이었다. 1942년 3월부터 아우슈비츠가 해방될 때까지 감독부는 SS 경제-관리 부처의 산하기관이었다.<ref>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아우슈비츠</ref>
 +
각각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들과 부속 수용소들의 총 3가지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첫째, 나치 통치에 실질적인 절대 세력이거나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감금하기 위하여. 둘째, SS 부대 소유의 건설 관련 사업, 추후에는 군사 장비 및 전쟁 관련 물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하여. 셋째, SS와 경찰, 나치 독일이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은 소수의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우슈비츠 제 1호===
+
====아우슈비츠 제 1호====
 
<gallery mode=packed>
 
<gallery mode=packed>
 
파일:YSM_제1수용소.jpg|제1수용소<ref>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ref>
 
파일:YSM_제1수용소.jpg|제1수용소<ref>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ref>
 
파일:YSM_수용소입구.jpg|수용소입구<ref>사진출처:By xiquinhosilva - https://www.flickr.com/photos/xiquinho/16380127035/,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6102385</ref>
 
파일:YSM_수용소입구.jpg|수용소입구<ref>사진출처:By xiquinhosilva - https://www.flickr.com/photos/xiquinho/16380127035/,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6102385</ref>
 
</gallery>
 
</gallery>
아우슈비츠의 가장 중요한 수용소에 해당하는 곳으로, 제 1호는 오슈비엥침 부근에 설립되었다. 아우슈비츠 제1호는 3가지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첫쨰, 나치 통치에 실질적인 절대 세력이거나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감금하기 위하여. 둘째, SS부대 소유의 건설 관련 사업 추후에는 군사 장비 및 전쟁 관련 물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하여. 셋째, SS와 경찰이 경찰이 나치 독일이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낙인찍은 소수의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지막 목적 때문에, 아우슈비츠 제1호에도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이 있었다. 초기에 SS기술자들은 수감자동인 제 11블록 지하에 간이 가스실을 건설하였으나, 이후에 수감자동 외부에 별도의 건물을 짓고 시체 소각장과 그 부속으로 정식 가스실을 만들었다. 아우슈비츠 1호에서 SS 소속 의사들은 병원 병동과 제 10블록에서 의학 실험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신생아, 쌍둥이, 난쟁이들을 대상으로 비정규-과학실험를 실시하고 강제로 불임 시술과 거세를 실시하였으며 성인을 대상으로는 저체온증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이러한 의사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SS 대위 요제프 멩겔레 박사였다. 시체 소각장과 의학 실험 블록 사이에는 검은 벽이 있었는데 SS 경비병들은 여기에서 수천 명의 수감자들을 죽였다.
+
아우슈비츠의 가장 중요한 수용소에 해당하는 곳으로, 제 1호는 오슈비엥침 시 외곽에서 구 폴란드 군막사를 개조해 1940년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로 운영되었으나, 이후에는 SS본부, 멩겔레 사무실 등 행정 본부의 기능을 수행했고, 크레마토리움1이라는 초기 가스실 시험이 운용되었으며, 멩겔레 의사에 의해 잔인한 의학 실험이 진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죽음의 벽'이라는 곳에서 총살을 하는 등 고문과 처형도 자주 일어났다.  
  
 
{{인용문|
 
{{인용문|
57번째 줄: 59번째 줄:
  
  
===아우슈비츠 제 2호===
+
====아우슈비츠 제 2호====
 
[[파일:YSM_시체소각실.jpg|thumb|가운데|시체소각실<ref>-사진출처:By <a href="//commons.wikimedia.org/wiki/User:Sfu" title="User:Sfu">Marcin Białek</a> - <span class="int-own-work" lang="ko">자작</span>, <a href="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title="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CC BY-SA 3.0</a>,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470481">링크</a></ref>]]
 
[[파일:YSM_시체소각실.jpg|thumb|가운데|시체소각실<ref>-사진출처:By <a href="//commons.wikimedia.org/wiki/User:Sfu" title="User:Sfu">Marcin Białek</a> - <span class="int-own-work" lang="ko">자작</span>, <a href="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title="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CC BY-SA 3.0</a>,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470481">링크</a></ref>]]
아우슈비츠 제2호의 다른 이름은 아이슈비츠-비르케나우로 1941년 10월 브레진카의 부근에서 건설이 시작되었다. 오슈비엥친 부근에 세워진 3개의 집단 수용소 중, 아우슈비츠-비르네카우는 가장 많은 수감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수용소는 12개 이상의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각 구역 사이에는 가시 달린 전기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고, 아우슈비츠 1호와 마찬가지로 SS 경비대가 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1942년 이후에는 SS 경비견도 이에 추가되었다. 수용소에는 여성 구역, 남성 구역,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에서 이송되어 온 로마니 가족 수용소, 그리고 테레지엔슈타트 게토에서 끌려온 유태인 가족 수용소도 포함되었다.
+
아우슈비츠 제2호의 다른 이름은 아이슈비츠-비르케나우로, 첫번째 수용소에서 약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에서 1041년부터 건설되었다. 이 곳에서는 최대 규모의 가스실과 크레마토리움 4기가 운영되었으며, 집단학살이 주로 발생했다. 유대인, 집시, 여성/아이, 노약자들이 선별의 과정을 거쳐 가스실로 이동되었으며, 1944년에는 유대인 40만명이 이 곳에서 살해되었다. 이곳은 최대 규모의 수용소로, 여성 구역, 집시 가족 구역, 수용자 병원, 가스실 등의 다양한 공간 분리가 이루어졌다. 특히나 선로가 캠프 안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도착 후 바로 선별하고 선별 즉시 가스실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대량 학살 시스템이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이곳은 아우슈비츠 전체 학살의 심장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이 수용소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던 수용소로, 지클론B라는 가스로 대량학살을 실시하였으나, 이후 이 가스가 대량학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1943년 3월부터는 대규모 시체 소각장을 건설하였으며, 1944년 11월까지 SS의 주도 하에 계속하여 유대인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1944년 11월 히틀러의 명령으로 SS는 가동 중이던 가스실을 가동중지 시켰고, 1945년 1월 소련군이 진격해 오고 나서야 남아있던 가스 주입 장치를 파괴했다.
 
  
 +
====아우슈비츠 제 3호====
 +
[[파일:YSM_제3수용소.jpg|thumb|가운데|제3수용소-<ref>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ref>]]
 +
부나 또는 모노비츠라고도 불리우는 아우슈비츠 3호는 폴란드 모노비체 외곽에 위치한 부나 합성 고무 공장에서 일할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42년 10월에 건설되었다. 아우슈비츠 3호는 인근 독일 화학 기업인 IG Farben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이 곳에서 수용자들은 하루 12-14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으니 제대로 된 노동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영양 부족, 질병, 혹한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사망에 이르렀다. 또한, 노동력 착취를 위해 건설된 수용소인만큼 생산성이 떨어진 즉시 선별 후 처형당하거나 제2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아우슈비츠 제 3호===
+
이 외에도, 수십 개의 부속 수용소들이 존재했는데, 이는 나치와 독일 산업계가 지역 곳곳에서 수용자들을 유동성 인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Jawischowitz, Gleiwitz, Budzyn, Trzebinia 등의 지역에서 탄광, 공업, 전쟁 산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용자들에게 극한의 노동을 시키며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다.
[[파일:YSM_제3수용소.jpg|thumb|가운데|제3수용소-<ref>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ref>]]
+
 
부나 또는 모노비츠라고도 불리우는 아우슈비츠 3호는 폴란드 모노비체 외곽에 위치한 부나 합성 고무 공장에서 일할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42년 10월에 건설되었다. 아우슈비츠 3호는 학살의 공간보다는 노동 교육 수용소로서의 역할에 더 방점을 두었다. 수감자들은 주로 산업 및 군수 생산 또는 채취산업에 종사하도록 강요되었으며, 이 외에도 여러 독일 기업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운영되었다.
+
===아우슈비츠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었는가?===
 +
인종별로 보자면, 가장 많은 수의 희생자는 단연 유대인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ref>최종 해결책은 나치가 유대인을 전멸하려는 계획을 완곡하게 돌려 표현하는 용어이다.</ref>'이라는 나치의 계획 하에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 위해 운영된 주요 수용소 중 하나였다. 유럽 전역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강제노동, 굶주림,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로마인(집시)들도 유대인과 비슷하게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어 박해당했는데, 아우슈비츠에는 집시 가족 수용소가 따로 있었으며 이들 또한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폴란드계 사람들은 특히나 지식인, 종교인 정치 저항자들이 타겟이 되었다. 나치 독일의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잔혹한 통치를 받았으며, 수많은 폴란드 민간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
이 외에도, 나치의 '사회적 순수성' 정채에 따라 동성애자, 장애인, 여호와의 증인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는 강제노동, 고문,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며 강하게 탄압받았다.
 +
 
 +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은 즉시 '선별'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선별은 SS 의사나 장교들이 육안으로 보며, 대체로 성인 남성들이 해당되었던 노동 가능자로 판단되면 살아남아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을 하며 고문 당하고, 대체로 여성과 아이, 노인등이 속했던 노동 불가능자로 판단되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지는 과정을 일컫는다. 여성과 아이들 중 일부는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 실험을 주도했던 사람이 요제프 멩겔레이다.
 +
 
 +
<gallery mode=packed>
 +
파일:YSM_요제프.jpg|요제프 멩겔레<ref>사진출처:By Unknown, i.e. either Bernhard Walther or Ernst Hofmann or Karl-Friedrich Höcker - USHMM,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4059687</ref>
 +
파일:YSM_요제프2.jpg|쌍둥이 실험<ref>사진출처:https://www.joongang.co.kr/article/4945319</ref>
 +
</gallery>
 +
 
 +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멩겔레는, 특히 쌍둥이, 장애아, 난쟁이, 로마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 쌍둥이 실험, 눈 색깔 실험, 절단/접합 실험, 불임 실험 등을 통해 수많은 희생자들을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
이 외에도 안락사 프로그램, 가스 밴, 집단 학살 수용소, 집단 수용소에서 가스 학살의 방법을 통해 수많은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1945년 1월 중순,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 방면으로 진격해 오자 SS는 아우슈비츠와 보조 수용소들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SS 부대는 60,000명에 가까운 수감자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스템의 서쪽으로 행군시켰다. 이러한 죽음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날, 수천 명이 학살당하였다. 대부분이 유태인인 수만 명의 수감자들은 북서쪽으로 55킬로미터(약 30마일)를 행군하여 글라이비츠에서 비스마르크호이테, 알트하머 그리고 히덴부르그와 같은 북부 실레지아의 동쪽 보조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합류하거나, 서쪽으로 63킬로미터(약 35마일)를 행군하여 북부 실레지아의 우지슬라우(로슬라우)에서 자비스코비츠, 체코비츠 그리고 골레샤우와 같은 아우슈비츠 남쪽 보조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합류하였다. SS 경비대는 대오에서 낙오하거나 행군을 계속할 수 없는 자들은 무조건 사살하였다. 행군 과정에서 수감자들은 추운 날씨와 굶주림 그리고 과도한 햇빛에 노출로 인하여 계속적인 고통을 받았다. 글라이비츠 경로에서만 적어도 3,000명의 수감자들이 죽었으며 아우슈비츠에서 보조 수용소로 이동하는 철수 과정에서 15,00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라이비츠와 우지슬라우에 도착한 수감자들은 난방 시설이 없는 기차에 실려 독일 지역의 플로센뷔르크, 작센하우센, 그로스-로젠, 부헨발트, 다하우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등으로 수송되었다. 이러한 철도 여행은 4일이나 걸렸다. 음식과 물, 잠잘 곳과 담요도 없는 가운데서 많은 수감자들은 이러한 수송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하였다.
 
  
1945년 1월 말, SS와 경찰 간부들은 아우슈비츠-모노비츠의 보조 수용소인 블레흐하머에서 4,000명의 수감자들을 도보로 철수시켰다. 이 수감자들을 그로스-로젠 집단 수용소로 행군시키는 과정에서 SS는 약 800명의 수감자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SS 장교들은 아프거나 혹은 숨는데 성공하여 행군을 하지 않고 블레흐하머에 남아있던 수감자 200명 가량을 살해하였다. 일정이 약간 지체되기는 했으나, SS는 약 3,000명의 블레흐하머 수감자들을 그로스-로젠에서 독일의 부헨발트 집단 수용소로 수송하였다.
+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해방되었는가?===
  
  
124번째 줄: 137번째 줄:
 
* [https://heritage.unesco.or.kr/%EC%95%84%EC%9A%B0%EC%8A%88%EB%B9%84%EC%B8%A0-%EB%B9%84%EB%A5%B4%EC%BC%80%EB%82%98%EC%9A%B0-%EB%8F%85%EC%9D%BC-%EB%82%98%EC%B9%98-%EA%B0%95%EC%A0%9C-%EC%88%98%EC%9A%A9%EC%86%8C-%EB%B0%8F/ 유네스코와 유산,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https://heritage.unesco.or.kr/%EC%95%84%EC%9A%B0%EC%8A%88%EB%B9%84%EC%B8%A0-%EB%B9%84%EB%A5%B4%EC%BC%80%EB%82%98%EC%9A%B0-%EB%8F%85%EC%9D%BC-%EB%82%98%EC%B9%98-%EA%B0%95%EC%A0%9C-%EC%88%98%EC%9A%A9%EC%86%8C-%EB%B0%8F/ 유네스코와 유산,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https://www.mofa.go.kr/www/brd/m_4095/view.do?seq=301995&srchFr=&amp%3BsrchTo=&amp%3BsrchWord=&amp%3BsrchTp=&amp%3Bmulti_itm_seq=0&amp%3Bitm_seq_1=0&amp%3Bitm_seq_2=0&amp%3Bcompany_cd=&amp%3Bcompany_nm=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시 본 '잔혹의 역사']
 
* [https://www.mofa.go.kr/www/brd/m_4095/view.do?seq=301995&srchFr=&amp%3BsrchTo=&amp%3BsrchWord=&amp%3BsrchTp=&amp%3Bmulti_itm_seq=0&amp%3Bitm_seq_1=0&amp%3Bitm_seq_2=0&amp%3Bcompany_cd=&amp%3Bcompany_nm=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시 본 '잔혹의 역사']
 +
*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final-solution-overview?parent=ko%2F3384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최종 해결":개요]
  
  

2025년 5월 17일 (토) 11:00 판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2025-1 디지털인문학이란 5조 위키페이지




5조 - 아우슈비츠 수용소







연구목적 및 필요성

우리 5조는 예술 작품으로 본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연구하기로 했다. 나는 이번 개별 프로젝트에서는 홀로코스트 사건의 중심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연구하려 한다.

우리 조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연구하는 데 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중심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우슈비츠는 단순한 수용소를 넘어,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이 가장 집약적으로 실행된 장소이자, 홀로코스트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약 130만 명 이상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다.[1] 이처럼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구조적 폭력, 인간의 존엄성 파괴, 그리고 기억의 형성이라는 주제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수용소를 이해하는 것은 곧 홀로코스트 전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 집단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간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되새기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를 예술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연구 대상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html>

<iframe width="855" height="481" src="https://www.youtube.com/embed/zXAJo-GhbKE" title="인간의 잔혹함의 끝,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html>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으로,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수용소들은 모두 수감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다.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집단 수용소의 감독부 산하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941년부터 1942년 3월까지 집단 수용소 감독부는 SS 본부의 산하기관 및 SS 작전 본부 산하기관이었다. 1942년 3월부터 아우슈비츠가 해방될 때까지 감독부는 SS 경제-관리 부처의 산하기관이었다.[2] 각각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들과 부속 수용소들의 총 3가지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첫째, 나치 통치에 실질적인 절대 세력이거나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감금하기 위하여. 둘째, SS 부대 소유의 건설 관련 사업, 추후에는 군사 장비 및 전쟁 관련 물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하여. 셋째, SS와 경찰, 나치 독일이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은 소수의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우슈비츠 제 1호

아우슈비츠의 가장 중요한 수용소에 해당하는 곳으로, 제 1호는 오슈비엥침 시 외곽에서 구 폴란드 군막사를 개조해 1940년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로 운영되었으나, 이후에는 SS본부, 멩겔레 사무실 등 행정 본부의 기능을 수행했고, 크레마토리움1이라는 초기 가스실 시험이 운용되었으며, 멩겔레 의사에 의해 잔인한 의학 실험이 진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죽음의 벽'이라는 곳에서 총살을 하는 등 고문과 처형도 자주 일어났다.


Quote-left.png

ARBEIT MACHT FREI

Quote-right.png
출처: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에 있던 문구



아우슈비츠 제 2호

시체소각실[5]

아우슈비츠 제2호의 다른 이름은 아이슈비츠-비르케나우로, 첫번째 수용소에서 약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에서 1041년부터 건설되었다. 이 곳에서는 최대 규모의 가스실과 크레마토리움 4기가 운영되었으며, 집단학살이 주로 발생했다. 유대인, 집시, 여성/아이, 노약자들이 선별의 과정을 거쳐 가스실로 이동되었으며, 1944년에는 유대인 40만명이 이 곳에서 살해되었다. 이곳은 최대 규모의 수용소로, 여성 구역, 집시 가족 구역, 수용자 병원, 가스실 등의 다양한 공간 분리가 이루어졌다. 특히나 선로가 캠프 안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도착 후 바로 선별하고 선별 즉시 가스실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대량 학살 시스템이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이곳은 아우슈비츠 전체 학살의 심장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 제 3호

제3수용소-[6]

부나 또는 모노비츠라고도 불리우는 아우슈비츠 3호는 폴란드 모노비체 외곽에 위치한 부나 합성 고무 공장에서 일할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42년 10월에 건설되었다. 아우슈비츠 3호는 인근 독일 화학 기업인 IG Farben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이 곳에서 수용자들은 하루 12-14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으니 제대로 된 노동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영양 부족, 질병, 혹한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사망에 이르렀다. 또한, 노동력 착취를 위해 건설된 수용소인만큼 생산성이 떨어진 즉시 선별 후 처형당하거나 제2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외에도, 수십 개의 부속 수용소들이 존재했는데, 이는 나치와 독일 산업계가 지역 곳곳에서 수용자들을 유동성 인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Jawischowitz, Gleiwitz, Budzyn, Trzebinia 등의 지역에서 탄광, 공업, 전쟁 산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용자들에게 극한의 노동을 시키며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었는가?

인종별로 보자면, 가장 많은 수의 희생자는 단연 유대인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7]'이라는 나치의 계획 하에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 위해 운영된 주요 수용소 중 하나였다. 유럽 전역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강제노동, 굶주림,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로마인(집시)들도 유대인과 비슷하게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어 박해당했는데, 아우슈비츠에는 집시 가족 수용소가 따로 있었으며 이들 또한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폴란드계 사람들은 특히나 지식인, 종교인 정치 저항자들이 타겟이 되었다. 나치 독일의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잔혹한 통치를 받았으며, 수많은 폴란드 민간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이 외에도, 나치의 '사회적 순수성' 정채에 따라 동성애자, 장애인, 여호와의 증인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는 강제노동, 고문,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며 강하게 탄압받았다.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은 즉시 '선별'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선별은 SS 의사나 장교들이 육안으로 보며, 대체로 성인 남성들이 해당되었던 노동 가능자로 판단되면 살아남아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을 하며 고문 당하고, 대체로 여성과 아이, 노인등이 속했던 노동 불가능자로 판단되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지는 과정을 일컫는다. 여성과 아이들 중 일부는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 실험을 주도했던 사람이 요제프 멩겔레이다.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멩겔레는, 특히 쌍둥이, 장애아, 난쟁이, 로마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 쌍둥이 실험, 눈 색깔 실험, 절단/접합 실험, 불임 실험 등을 통해 수많은 희생자들을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외에도 안락사 프로그램, 가스 밴, 집단 학살 수용소, 집단 수용소에서 가스 학살의 방법을 통해 수많은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해방되었는가?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 시맨틱 데이터 구축 및 디지털 큐레이션을 하면서 도출한 사항을 기술
** 사실적인 관계와 사실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추정 등
** 시맨틱 데이터 구축 시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 등





참고 자료

이미지




논문 및 문헌




신문기사 및 사이트




주석

  1. [1]
  2.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아우슈비츠
  3. 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4. 사진출처:By xiquinhosilva - https://www.flickr.com/photos/xiquinho/16380127035/,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6102385
  5. -사진출처:By <a href="//commons.wikimedia.org/wiki/User:Sfu" title="User:Sfu">Marcin Białek</a> - 자작, <a href="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title="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CC BY-SA 3.0</a>,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470481">링크</a>
  6. 사진출처: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auschwitz
  7. 최종 해결책은 나치가 유대인을 전멸하려는 계획을 완곡하게 돌려 표현하는 용어이다.
  8. 사진출처:By Unknown, i.e. either Bernhard Walther or Ernst Hofmann or Karl-Friedrich Höcker - USHMM,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4059687
  9. 사진출처:https://www.joongang.co.kr/article/4945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