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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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염행당은 류치목 柳致睦 1771~1836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처음에는 단출하게 지었는데, 그의 증손자인 류영우 柳永佑 1850~1934 가 1905년에 크게 확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1954년에 불이 나서 안채, 사랑채와 후대에 지은 작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대문채와 별당, 사당만이 남아 있다. 별당채와 사당 사이의 흙돌담에 기와로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넣어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2020 초고

염행당은 조선 후기 문신인 류치목(1771~1836)이 1797년에 지은 집이다.

류치목은 12세에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힘써 관직에 나가 형조참의, 김해부사 등을 역임했다.

1905년에 그의 증손자인 류영우(1850~1934)가 이 집을 크게 확장하여 대문채, 안채, 별당, 정자, 사당 등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954년에 불이 나서 대문채와 별당, 사당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사랑채와 안채를 복원하였다.

별당채의 아랫벽에는 기와편으로 기쁨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넣었다. 또 별채와 사당 사이의 흙돌담에도 기와편으로 무늬를 장식하였다.

하회마을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뉘는데, 이 집은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남촌 중심에 자리하여 남촌댁으로 불린다.

2020 1차 수정

염행당은 조선 후기 문신인 류치목(1771~1836)이 1797년에 지은 집이다.

류치목은 류성룡의 8세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형조참의, 사간원 사간, 김해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류치목의 집은 단촐하였으나, 1905년에 그의 증손자인 류영우(1850~1934)가 크게 확장하여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954년에 불이 나서 대문채와 별당, 사당만이 남아 있었는데, 2011년에 사랑채와 안채를 복원하였다.

별당채의 아랫벽에는 기와편으로 기쁨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넣었다. 또 별채와 사당 사이의 흙돌담에도 기와편으로 무늬를 장식하였다.

하회마을은 마을 중심의 길을 두고 남촌과 북촌으로 나뉘는데, 이 집은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남촌 중심에 자리하여 남촌댁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