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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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곳은 충청도 감영(監營)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감영 또는 우영(右營)에서 체포된 교인들을 현 교동성당 인근에 있는 향옥(鄕獄)에 투옥하였다가 이곳에서 처형하였다.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를 비롯하여 병인박해(1866) 때의 성 손자선(孫次善) 토마스 등 이름이 밝혀진 분만 해도 337위에 이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가 서려 있는 곳이다.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에 황새가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죄인들이 목에 항쇄[목에 씌우는 칼]를 차고 이곳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충청도 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당시 충청도의 감영은 공주에 있었고, 전·후·좌·우·중의 진영 가운데 우영(右營)이 공주에 있었다. 공주의 감영 또는 우영에 체포된 교인들은 현 교동성당 인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곳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본래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지만, 일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의 죄목으로 ‘항쇄(項鎖)’라는 목에 씌우는 칼을 두르고 이곳에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황새바위에서 최초로 순교한 천주교인은 충청도 내포 일대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여 ‘내포 천주교의 사도’이자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의 외조부 이존창(李存昌, 1759~1801)이다. 그는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인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기록상 190 여명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에서 주로 감옥 등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집행되는 처형을 제외하고, 참수형 등 공개적으로 실시되는 형벌에 처해진 이들 중 다수가 이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다. 현재까지 황새바위의 순교자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들만 무려 248명에 이른다.

황새바위는 1980년 이후에야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성역화 작업이 추진되었다. 황새바위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천주교단에서 부지를 매입하였다. 1985년에는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새긴 무덤경당 및 순교탑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이후 성지 담당 신부도 부임하고 있다.

1차 수정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은 충청도 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공주 일대는 비교적 산간 지역이 많아 핍박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또한 공주에는 충청도 감영이 설치되어 있어, 체포된 신도들은 현 교동성당 인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곳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본래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항쇄(項鎖)’라고 불리는 목에 씌우는 칼을 두르고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황새바위에서 최초로 순교한 천주교인은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의 외조부 이존창(李存昌, 1759~1801)이다. 그는 신유박해 때인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기록상 190여 명이 확인된다. 주로 감옥 등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집행되는 처형을 제외하고, 참수형 등 공개적으로 실시되는 형벌에 처해진 이들 중 다수가 이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다. 현재까지 황새바위의 순교자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들만 무려 248명에 이른다.

황새바위는 1980년 이후에야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성역화 작업이 추진되었다. 1985년에는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새긴 무덤경당 및 순교탑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이후 성지 담당 신부도 부임하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은 충청도 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순교유적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을 처형한 처형터로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 공주 일대는 비교적 산간 지역이 많아 핍박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살기에 적당한 곳이 었다. 또한 공주에는 충청도 감영이 설치되어 있어, 체포된 신도들은 현 교동성당 인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곳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 내포와 더불어 공주는 평민 중심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기에 감영뿐만 아니라, 인근 감옥에 수감된 신자들도 이곳 황새바위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 목에 씌우는 칼을 두르고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 목에 씌우는 칼을 두르고 처형을 당했다고 해서 유래한 명칭이라는 설이 있다.(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내용일수 있어 수정함.)
    • 황새바위는 1980년 이후에야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성역화 작업이 추진되었다. 1985년에는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새긴 무덤경당 및 순교탑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이후 성지 담당 신부도 부임하고 있다. -> 황새바위는 1980년 성지 조성이 시작되었다. 1984년이후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가 부임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조 베르나르도 신부와 건축가 김원에 의해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새긴 무덤경당 및 순교탑이 건립되었으며, 이후 현재의 성당과 성모광장 등이 조성되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대체적으로 유적지에 대한 충실한 설명이 서술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다만, 엄혹한 시기에 참수형을 공개적으로 시행하여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위협하려는 관의 의도와 이러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하였던 신도들의 의지, 이러한 사연이 서려 있는 이 “터”가 중요하다는 점이 좀 더 부각이 되고 현재 설치돼 있는 시설물, 기념물 등은 그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관람객들은 현재의 시설물들까지 모두 문화재로 인식할 수 있는데 정확히 이곳의“문화재”가 어떤 것이지를 정확히 짚어 줄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하려면 공주시 또는 충청남도로부터 “문화재 구역”의 경계를 정확히 확인하고 안내문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마지막 단락의 성역화 작업 추진관련 정보는 불필요해 보입니다. 도기념물로서 그 가치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의미가 충분히 살아납니다. 마지막 단락의 문장은 오히려 특정 종교에서 나서는 듯한 느낌이 강조 될뿐이어서 안내문 안에 넣지 않는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 수정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곳으로,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항쇄(項鎖)’라고 불리는 목에 씌우는 칼을 두르고 처형 당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황새바위에서 최초로 순교한 천주교인은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의 외조부 이존창(李存昌, 1759~1801)이다. 그는 신유박해 때인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기록상 190여 명이 확인된다. 주로 감옥 등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집행되는 처형을 제외하고, 참수형 등 공개적으로 실시되는 형벌에 처해진 이들 중 다수가 이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다. 현재까지 황새바위의 순교자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들만 무려 248명에 이른다.

1980년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황새바위의 성역화 작업이 추진되었다. 1984년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가 부임하기 시작하였고, 1985년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무덤경당 및 순교탑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