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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양수척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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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양수척 효자비
청주 양수척 효자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양수척 효자비
한자 淸州 楊水尺 孝子碑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131-3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145호
지정일 2009년 3월 6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청주 양수척 효자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초기 백정 양수척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전반적으로 풍화되어 알아보기 힘드나, 앞면에는 비석의 이름을 뒷면에는 건립 시기 등을 새겼으나,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청주 운동동 비선거리에 양수척이 두 아우와 늙은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네, 늘 노모를 홀대하여 주변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당시 이름난 효자였던 경대유(慶大有)가 그 소문을 듣고 삼형제를 불러 크게 꾸짖자, 크게 뉘우치고 이후로는 노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어느 날 병든 노모를 위해 청주읍성으로 약을 구하러 갔는데, 갑자기 홍수가 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혔다. 이에 양수척이 크게 슬퍼하자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천민 신분의 인물에게 효자비를 세워준 예는 매우 드믄 사례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귀중한 문화재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천민 신분이었지만 효도로 이름을 날린 양수척 삼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0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높이 112㎝, 폭 34㎝, 두께 23㎝이다. 앞면에는 비석의 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우게 된 경위를 적었는데 마모가 심해 잘 보이지 않는다.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에 청주 운동동 비선거리에 살았던 양수척 삼형제는 늙은 어머니를 홀대하여 주변의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효자로 이름났던 경대유라는 사람이 형제들을 불러 크게 꾸짖고 가르치자, 세 사람은 크게 뉘우친 후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병든 어머니를 위해 약을 구해오던 길에 홍수가 나 집으로 가는 길이 막혀 양수척이 크게 슬퍼하자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 양수척 이야기가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지자체에서 제공한 문안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음.
  • 양수척은 조선시대에 버들로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아 생활하던 천민 집단으로 ‘무자리’라고도 불렀다.


참고자료

  • 청주양수척효자비,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301450000
  • 내륙문화탐방 - 양수척효자비에 얽힌 이야기, 충북일보, 2014.5.1.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39883 -> 조선 세종에서 성종에 걸친 시대, 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비선거리에는 양수척(楊水尺) 삼형제가 살았다. 양수척은 조선시대에 버들고리로 체나 키를 만들어 팔던 천민집단으로 일명 '무자리'라고도 했다. 무자리 마을은 양반이나 평민 동네와는 약간 떨어져 있었다. 일정한 거처를 마련해 정착하는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떠돌이 생활도 했다. 교육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해 까막눈이 대부분이었고, 평민과 어울릴 수 없는 하층민이므로 성정(性情) 또한 거칠었다. 비선거리에 살던 양수척 3형제도 누구보다 패악질이 심했다. 어찌나 품행이 사나웠는지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물론 툭하면 동네사람들을 두들겨 팼고, 잔치집이나 초상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노모는 항상 이들 형제들을 걱정하다 병이 들어 눕게 되고 누운 채로 배변하게 됐는데, 이들 3형제는 노모를 모실 수 없으니 고려장을 하려고 했다. 동네사람들이 온갖 패악질을 말리려 해도 이들 형제의 힘이 워낙 장사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들에게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 때 효자마을(효촌리)에 와 있던 경대유(慶大有)가 삼형제를 불러 인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경대유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이산현감을 지낸 인물이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나 경대유의 높은 가르침으로 이들은 점차 교화돼 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도 망나니 취급을 받던 양수척 3형제는 드디어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부모를 극진히 모심은 물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지난날 과오를 사죄했다. 어느 날 모친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청주성으로 들어가 한약을 지어 돌아오는 길에 홍수가 나서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건너게 됐으며 약을 달여 모친의 병구완을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들은 면피용으로 효도를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모를 섬겨 소문난 효자가 됐으니 '개과천선'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후에 동네 사람들은 양수척 3형제의 효행을 기려 마을 입구에 '효자비'를 만들어 세웠으니 이 때가 1860년(철종11년)의 일이다. 방형대석 위에 높이 112㎝, 폭 34㎝, 두께 23㎝의 규모로 세워졌으며 비석 전면에 '양수척효자비(楊水尺孝子碑)'라고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길가에 방치된 데다 석재인 화강암이 비바람에 마모돼 글씨를 판독하기가 어렵다. 신분 구별이 뚜렷하던 조선시대에 천민의 효자비가 건립된 건 매우 이례적이다. 송덕비, 충효비 등에서 보듯 조선시대의 돌 비는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상민이 함부로 비를 세웠다가 큰 코를 다치는 시대에 동네사람들이 정성을 보태 천민의 효자비를 세웠다하니 그 효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국을 통틀어 봐도 양수처의 효자비는 이곳밖에 없다.
  • 우리나라 유일의 천민 효자비 양수척효자비, 충청타임즈, 2020.8.10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23513 -> 주인공인 양수척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도 다양하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 초기 성종 임금 때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 사는 부부가 늦둥이를 낳았다. 얼마나 귀엽든지 서로 상대편을 때리라고 시키고는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부모를 때리는 게 버릇이 된 아이는 커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도 어머니를 때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양수척과 두 동생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횡포를 저질렀고, 늙은 어머니는 걸핏하면 자식에게 매를 맞으며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매일 자식들을 걱정하던 노모가 병으로 눕자 삼형제는 그냥 놔둘 수 없다며 고려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학식이 높고 효자로 조정에까지 알려진 경연(慶延)이 이웃 마을인 남일면(효촌)에 살고 있었다. 경연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석에 눕자 마을 앞 연못의 얼음 속에서 잉어를 잡고, 어머니가 병석에 누웠을 때는 마을 상봉의 눈 덮인 산속에 시루를 엎어놓고 고사를 드려 고사리를 돋아나게 하여 병을 고친 유명한 효자이자 청백리였다. 어느 날 경연의 집으로 심부름을 갔던 양수척이 하룻밤을 묵으며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효자 경연의 행동을 지켜보게 되었다. 경연이 어른보다 먼저 이불에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효자라면서 다른 게 뭐가 있느냐고 욕을 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보니 경연이 자기가 누워 있던 이불 속으로 어머니를 모셔 주무시게 한다. 어머니가 편히 주무시게 하려고 온기로 이불 속을 따뜻하게 하는 경연의 효행을 보고 그동안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쳤다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양수척은 월운천 건너편 청주읍성 쪽에 있던 약방으로 급히 뛰어갔다. 약을 지어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물이 넘쳐 월운천을 건널 수 없었다. 약봉지를 손에든 양수척이 건너편의 집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물길이 갈라져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다.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양수척의 효행이 지극했고, 그때 물이 1척만큼 벌어졌다고 해서 수척(水尺)이라는 이름도 얻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