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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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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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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곽예(1232~1286)의 묘소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선갑(先甲), 호는 연담(蓮潭)이며, 1255년(고려 고종42)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자감대사성, 감찰대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1263년(원종4) 납치된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286년(충렬왕12) 원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가던 중 의주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곽예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해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늘 한결같았고,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하여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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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 묘소는 본래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묘소 앞에는 상석, 좌우 문인상, 2개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는 신도비와 시비(詩碑)가 있고, 묘소의 좌측에 곽예의 사당인 청원사(淸原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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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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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명필가였던 곽예(1232-1286)의 묘소이다. 본래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는데,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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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는 1255년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한 후 일본으로 사신을 다녀오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하는 사신이 되어 떠나던 중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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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둥글게 쌓은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문인상 1쌍, 묘비 2기가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에 서 있는 비석의 비문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최익현(1833-1906)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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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산 입구에는 곽예를 포함한 청주곽씨의 인물들을 제향하는 사당인 상당사와 곽예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884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복한(1860-1924)이 지었고, 글씨는 오영근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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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옮기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 신도비의 위치를 ‘무덤 옆’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나, 봉분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긴 것으로 보임. / 최익현의 비문도 갑신년(1884)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나(비문 사진으로 판독 가능함)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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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묘가 있었다고 하는 대율리는 곽예의 사위였던 최득평의 후손들인 전주 최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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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사는 1974년에 ‘청원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으며, 1996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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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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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 충청투데이, 2012.6.14.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5702 -> 연담 곽예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4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주사직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충렬왕 12년에 지밀직사 감찰대부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축하사절로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표는 최익현이, 신도비는 김복현이 지었다. 원래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는 것이다. 청원군에 있던 묘소를 이장해 왔다는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충청일보 편집국장을 하면서 '인맥천년'이란 책을 펴낸 이재준 씨였다.  그의 저서 '인맥천년'에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는 원래 밤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속칭 대삐미라고도 불리는 마을 입구에는 '전주최씨 세거지'란 표석이 있고, 주변엔 병자호란 때 영의정을 지낸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선조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은 청주 곽씨를 외가로 부르고 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청주 곽씨의 중시조인 연담 곽예 선생이 전주에서 사직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최득평이란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곽예는 사위로 삼았고 득평은 상주 목사와 김해 도호부사 등 벼슬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대빼미에 정착하게 된 것도 처가인 청주 곽씨 때문으로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명곡 최석정 등 기라성 같은 후손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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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 신도비 – 충북 청주[12],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515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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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연담공 곽예묘소 석물 – 충북 청주[15],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71114138 -> 묘표 비문 사진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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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신도비와 연담공 곽예 묘소 위치, 가는 길 – 충북 청주,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151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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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9월 7일 (화) 00:33 판


청주 곽예 묘소
청주 곽예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곽예 묘소
한자 淸州 郭預 墓所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20-1번지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20호
지정일 1977년 12월 6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청주 곽예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5

고려 후기의 문신인 연담공 곽예(郭預,1232~1286) 선생의 묘소이다. 본래 묘소는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겼다.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묘표(墓標)와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곽예 선생은 자를 선갑(先甲), 호는 연담이라 했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1255년(고려 고종 42)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286년(충렬왕 12)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사절로 가는 도중에 55세로 사망하였다. 연담공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명필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법을 본받았다. 『동문선』에 「감도해(感渡海)」등 여러 편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2021

고려 후기의 문신 곽예(1232~1286)의 묘소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선갑(先甲), 호는 연담(蓮潭)이며, 1255년(고려 고종42)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자감대사성, 감찰대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1263년(원종4) 납치된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286년(충렬왕12) 원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가던 중 의주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곽예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해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늘 한결같았고,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하여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곽예 묘소는 본래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묘소 앞에는 상석, 좌우 문인상, 2개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는 신도비와 시비(詩碑)가 있고, 묘소의 좌측에 곽예의 사당인 청원사(淸原祠)가 있다.

영문

2015

This is the tomb of Gwak Ye (1232-1286), a scholar official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n 1255, Gwak placed first in the state service examination and served several important posts afterwards. He was a renowned poet and master calligrapher, with a number of followers of his calligraphy style. Some of his poems were recorded in Dongmunseon, Anthology of Korean Literature, published in 1478 during the Joseon Dynasty (1392-1910). Gwak was known as modest, harmonious, and kind to everyone. He died on the way to China in a mission to congratulate the Yuan emperor for his birthday. At the tomb, there are also a tombstone and a stele, with the epitaphs composed by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Choe Ik-hyeon and Kim Bok-han, respectively.

2021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명필가였던 곽예(1232-1286)의 묘소이다. 본래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는데,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곽예는 1255년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한 후 일본으로 사신을 다녀오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하는 사신이 되어 떠나던 중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낮고 둥글게 쌓은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문인상 1쌍, 묘비 2기가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에 서 있는 비석의 비문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최익현(1833-1906)이 지었다.

묘역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산 입구에는 곽예를 포함한 청주곽씨의 인물들을 제향하는 사당인 상당사와 곽예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884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복한(1860-1924)이 지었고, 글씨는 오영근이 썼다.

  • 왜 옮기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 신도비의 위치를 ‘무덤 옆’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나, 봉분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긴 것으로 보임. / 최익현의 비문도 갑신년(1884)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나(비문 사진으로 판독 가능함)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 본래 묘가 있었다고 하는 대율리는 곽예의 사위였던 최득평의 후손들인 전주 최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상당사는 1974년에 ‘청원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으며, 1996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참고자료

  •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 충청투데이, 2012.6.14.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5702 -> 연담 곽예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4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주사직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충렬왕 12년에 지밀직사 감찰대부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축하사절로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표는 최익현이, 신도비는 김복현이 지었다. 원래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는 것이다. 청원군에 있던 묘소를 이장해 왔다는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충청일보 편집국장을 하면서 '인맥천년'이란 책을 펴낸 이재준 씨였다. 그의 저서 '인맥천년'에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는 원래 밤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속칭 대삐미라고도 불리는 마을 입구에는 '전주최씨 세거지'란 표석이 있고, 주변엔 병자호란 때 영의정을 지낸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선조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은 청주 곽씨를 외가로 부르고 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청주 곽씨의 중시조인 연담 곽예 선생이 전주에서 사직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최득평이란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곽예는 사위로 삼았고 득평은 상주 목사와 김해 도호부사 등 벼슬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대빼미에 정착하게 된 것도 처가인 청주 곽씨 때문으로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명곡 최석정 등 기라성 같은 후손을 배출하였다.
  • 곽예 신도비 – 충북 청주[12],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5155708
  • 청주 연담공 곽예묘소 석물 – 충북 청주[15],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71114138 -> 묘표 비문 사진 상세
  • 곽예신도비와 연담공 곽예 묘소 위치, 가는 길 – 충북 청주,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151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