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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원은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황온순(黃溫順)이 1941년에 지은 개인 살림집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면서 보육 및 탁아시설로 활용되었다. 1946년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에서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48년 원불교 익산지부가 설립되면서 임시교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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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원은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황온순(黃溫順)이 '''1941년'''에 지은 개인 살림집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면서 보육 및 탁아시설로 활용되었다. 1946년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에서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48년 원불교 익산지부가 설립되면서 임시교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신원은 ‘ㄱ’자형 본채와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이다. 주로 일본식 목조 구조이며 부분적으로 전통적 기법을 수용하였다. 외관에는 유리 미서기와 창호, 시멘트기와, 처마 끝 함석 차양 등을 설치하여 근대 주택의 모습을 보인다.
 
정신원은 ‘ㄱ’자형 본채와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이다. 주로 일본식 목조 구조이며 부분적으로 전통적 기법을 수용하였다. 외관에는 유리 미서기와 창호, 시멘트기와, 처마 끝 함석 차양 등을 설치하여 근대 주택의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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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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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정신원은 본래 원불교의 여성 교역자 황정신행(1903-2004, 본명 황온순)의 살림집으로 1943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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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원은 원래 원불교의 교역자 황온순(1903-2004)이 살던 집으로 1941년에 지어졌다. 황온순은 60여 년간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900명 이상의 고아를 돌봐,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린다.  
 
 
‘한국 고아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황정신행은 1936년에 원불교에 입교하였으며, 2년 뒤인 1938년 서울에서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을 만난 후 교단의 경제적 토대 마련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가 집을 교단에 기증한 이후, 1946년에는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의 사무실로 이용되었고, 1948년에는 원불교 익산지부의 임시 교당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1950) 기간 중에는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는 보육 및 탁아시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ㄱ’자형의 본채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채의 외관은 유리로 된 미서기 문과 창호, 시멘트 기와,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 근대 주택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건물의 이름은 황정신행의 이름 중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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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온순이 이 집을 교단에 기증한 이후, 1946년에는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의 사무실로 이용되었고, 1948년에는 원불교 익산지부의 임시 교당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는 보육 및 탁아시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익산문화대전과 기존 문안에는 1941년 건축으로 되어 있으나 원불교 소개 패이지에는 1943년으로 되어 있어 확인 필요함. (교단 작성 내용 기준으로 문안 작성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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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원은 본채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리로 된 미서기 문과 창호, 시멘트 기와,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 20세기 초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2021년 8월 4일 (수) 05:01 판


정신원 淨信院
교보 제3호 익산성지 정신원, 원불교 소개 홈페이지.
Goto.png 종합안내판: 원불교 익산성지



해설문

국문

정신원은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황온순(黃溫順)이 1941년에 지은 개인 살림집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면서 보육 및 탁아시설로 활용되었다. 1946년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에서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48년 원불교 익산지부가 설립되면서 임시교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신원은 ‘ㄱ’자형 본채와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이다. 주로 일본식 목조 구조이며 부분적으로 전통적 기법을 수용하였다. 외관에는 유리 미서기와 창호, 시멘트기와, 처마 끝 함석 차양 등을 설치하여 근대 주택의 모습을 보인다.

  • 익산문화대전과 기존 문안에는 1941년 건축으로 되어 있으나 원불교 소개 패이지에는 1943년으로 되어 있어 확인 필요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정신원은 원래 원불교의 교역자 황온순(1903-2004)이 살던 집으로 1941년에 지어졌다. 황온순은 60여 년간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900명 이상의 고아를 돌봐,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린다.

황온순이 이 집을 교단에 기증한 이후, 1946년에는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의 사무실로 이용되었고, 1948년에는 원불교 익산지부의 임시 교당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는 보육 및 탁아시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정신원은 본채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리로 된 미서기 문과 창호, 시멘트 기와,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 20세기 초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참고자료

  • 원불교 익산성지,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482 -> 정신원은 본래 팔타원 황정신행의 집으로 1941년 지어졌으며, 희사받아 1948년 익산교당 창립 시 교당으로 사용되었다.
  • 교보 제03호 익산성지 정신원, 원불교 소개 https://guide.won.or.kr/pages/sungji/iksan/14 -> 정신원은 원기 26년 팔타원 황정신행이 중앙총부 구내에 있던 추산 서중안 대호법의 집터에 지은 사가입니다. 원기 28년(1943) 조갑종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자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가 아들 강필국의 수양을 위해 초가를 헐고 목조와즙 「ᄀ」자 곡두형 집을 건축하여 한때 사용하다가 총부에 희사 했습니다. 외관은 유리 미서기문과 창호, 시멘트기와, 처마 끝의 함 석차양을 한 근대주택입니다. 원기 31년 중앙총부에서 유일학림이 개원되자 학림장과 학감의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원기 33년 익산교당이 중앙총부에서 독립해 나가기 전 임시 교당으 로 사용되었습니다. 원기 45년 4월부터는 교서편수기관인 「정화사(正化社)」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원기 81년에는 정산 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건물명의 팔타원 황정신행의 이름 가운데 ‘정신(淨信)’에서 유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