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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암은 의성김씨 김자강(金自江), 김완(金琬), 김영균(金永鈞) 3대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재실이다. 원사암이 자리한 녹전면 신평리 둔번마을은 김자강의 할아버지 김을방(金乙邦)이 고려 말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들어와 정착한 뒤, 지금까지 의성김씨가 대대로 살아온 씨족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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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본래 김자강의 7대손인 김유음(金有音, 1607~1680)이 김자강의 어머니인 안동권씨의 묘 아래쪽에 ‘사암(思庵)’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재실이었다고 한다. 김유음의 아들 김만휴(金萬烋, 1625~1694)가 1685년 무렵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원사암으로 고쳐 불렀다. 현재 원사암에 걸려 있는 중건기 현판에 ‘상지이년 을축(上之二年 乙丑)’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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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암은 ‘ㅡ’자형의 몸채와 ‘ㄷ’자형의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몸채 건물은 기단 위에 높게 지어 위계를 나타냈다. 몸채 중앙에는 대청을 두었으며, 좌우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祭官)과 유사(儒士)가 사용하는 온돌방이 있다. 특히 대청 뒷면의 창문은 17세기 이전의 창호 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설주는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다.
  
 
===2016 영문===
 
===2016 영문===

2021년 6월 23일 (수) 15:20 판

원사암
Wonsaam Ritual House
원사암,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원사암
영문명칭 Wonsaam Ritual House
한자 遠思庵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녹전로 752-41
지정번호 시도민속문화재 제128호
지정일 2001.11.01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
웹사이트 원사암,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2016 국문

의성김씨 김자강(金自江)․완(琬)․영균(永鈞) 3대의 묘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로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다. 원래는 사암(思庵)이라고 했다가, 김자강의 7세손 유음(有音)의 아들인 만휴(萬烋, 1625~1694)가 1685년경에 지금의 장소로 옮기고 원사암(遠思庵)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중건기에 의하면 ‘상지삼년(上之三年) 을축(乙丑)’[검토 1]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1865년(고종 2)에 중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강당을 중심으로 건축된 튼 ‘口’자형의 홑처마 건물이다. 특히 대청 뒷면의 창문은 17세기 이전의 창호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설주는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등 다른 자료에서는 “상지이년 을축(上之二年 乙丑)”으로 확인됨.


2021 국문

초고

원사암은 의성김씨 김자강(金自江)‧김완(金琬)‧김영균(金永鈞) 3대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김자강은 이 마을 입향조인 김을방(金乙邦)의 손자이며, 재실이 자리한 녹전면 신평리 둔번마을은 의성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건물은 본래 김자강의 7대손인 김유음(金有音, 1607~1680)이 김자강의 어머니인 안동권씨의 묘 아래쪽에 ‘사암(思庵)’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재실이었는데, 김유음의 아들 김만휴(金萬烋, 1625~1694)가 1685년 무렵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사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현재 원사암에 걸려 있는 중건기 현판에 '상지이년 을축(上之二年 乙丑)'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고종 2년(1865)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몸채 앞에는 좌우 익사(翼舍)가 연결된 대문간채가 몸채와 약간 떨어져 자리하고 있으며, 몸채 건물은 기단을 쌓아 다른 건물들보다 높게 지어 건물 간의 위계 질서를 나타냈다.

몸채 건물 중앙에는 대청을 두었으며, 좌우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祭官)과 유사(儒士)가 사용하는 온돌방이 있다. 특히 대청 뒷면의 창문은 17세기 이전의 창호 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설주는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다.

  • 김자강 등의 묘는 이곳에서 30m 정도 떨어진 좌측 편 야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 설명 참조)

1차 수정

원사암은 의성김씨 김자강(金自江), 김완(金琬), 김영균(金永鈞) 3대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재실이다. 원사암이 자리한 녹전면 신평리 둔번마을은 김자강의 할아버지 김을방(金乙邦)이 고려 말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들어와 정착한 뒤, 지금까지 의성김씨가 대대로 살아온 씨족마을이다.

이 건물은 본래 김자강의 7대손인 김유음(金有音, 1607~1680)이 김자강의 어머니인 안동권씨의 묘 아래쪽에 ‘사암(思庵)’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재실이었다고 한다. 김유음의 아들 김만휴(金萬烋, 1625~1694)가 1685년 무렵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원사암으로 고쳐 불렀다. 현재 원사암에 걸려 있는 중건기 현판에 ‘상지이년 을축(上之二年 乙丑)’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사암은 ‘ㅡ’자형의 몸채와 ‘ㄷ’자형의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몸채 건물은 기단 위에 높게 지어 위계를 나타냈다. 몸채 중앙에는 대청을 두었으며, 좌우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祭官)과 유사(儒士)가 사용하는 온돌방이 있다. 특히 대청 뒷면의 창문은 17세기 이전의 창호 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설주는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다.

2016 영문

This is a ritual house for preparing ceremonial rituals and maintaining the tombs of a three-generation family from the Uiseong Kim Clan, namely, Kim Ja-gang, his son Kim Wan, and his grandson Kim Yeong-gyun. It is said that the house was originally built near the tomb of Kim Ja-gang’s mother in the mid-17th century, and his descendant Kim Man-hyu moved it to the current location and named it Wonsaam in 1685. According to records, the present building was rebuilt in 1865. The house has a single-eaved roof, and the windows of the main wooden floor display the typical style of windows popularly used prior to the 17th century.


참고자료

  • 원사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443701280000 -> 대청 배면 영쌍창은 17세기 이전에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창호형식으로, 영이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착탈식인 점은 보기 드문 예이다.
  • 원사암,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26 -> 김자강(金自江)은 음직으로 참봉과 무과에 올라 훈련원참군을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선된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 안동의 재사 문화재, 원사암(遠思庵), 겨울섬, 개인 블로그 https://gotn.tistory.com/1173 -> 내부 사진 상세한 편
  • 700년간 의성 김씨만 살아온 ‘안동 둔번마을’, 주간동아, 2005.2.14. https://weekly.donga.com/3/all/11/64958/1 -> 김을방의 아들 김축(軸)을 비롯, 증손 완(琬), 고손 영균(永鈞), 8세손 약( ), 13세손 만휴(萬烋) 등…. 그 아랫대에 이르기까지 문필이 이미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모두 천거된 벼슬을 뿌리치고 둔번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냈다는 것. / 고려 말 세상을 등지고 이곳으로 은둔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의성 김씨 평장사공(平章事公) 김춘(椿)의 증손 김을방(乙邦)과 그의 식솔들이 바로 그들. 김을방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 벼슬이 교찬에 이른 학자였지만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어지러운 정국을 견디지 못하고 이곳에 내려와 마을 이름과 자신의 아호조차 ‘둔번’(遁煩, ‘번거로움을 피해 운둔한다’)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