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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 및 부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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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11일 (금) 11:01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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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 및 부조묘
Birthplace and Shrine of Bak Su-ryang
대표명칭 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 및 부조묘
영문명칭 Birthplace and Shrine of Bak Su-ryang
한자 莪谷 朴守良 先生 生家 및 不祧廟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해설문

국문

이곳은 박수량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현재는 부조묘(不祧廟)*가 지어져 있다. 정혜공 아곡 박수량(1491~1554) 선생은 명종 때 이름난 신하로 중종 9년(151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후에 38년 동안 호조·예조·형조·공조, 한성부판윤(정2품, 지금의 서울시장), 의정부우참찬(정2품), 함경도·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선생의 시호**는 정혜(貞惠)다. 정(貞, 곧을 정)은 ‘청렴결백하였다’라는 청백수절(淸白守節)을 의미하고, 혜(惠, 은혜 혜)는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이 친부모처럼 따랐다’라는 애민호여(愛民好與)를 뜻한다. 시호만 보더라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선정된 선생의 청렴한 관직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청렴결백한 생활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명종 임금은 선생의 청렴결백한 생활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선생의 부모가 살고 계신 이곳에 보냈는데, 암행어사는 “선생의 고향 집은 비가 새는 초가이며, 굴뚝에서는 한 달 중 반은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라고 보고하였다. 명종 임금은 이런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아곡리에 99칸짜리 청백당(淸白堂)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선생이 한양에서 돌아가신 후 고향에 내려올 장례비조차 없자 명종 임금은 장례비를 지원했다. 그리고 묘비(墓碑)를 내려보내면서 “박수량의 청백함을 새삼스럽게 비에 새기는 것은 그의 청렴함을 잘못 서술하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워라”하여 선생의 묘 앞에는 비문 없는 백비(白碑)가 세워졌다. 박수량 백비는 황룡면 금호리에 있고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후손들은 선생의 생가였던 이곳에 부조묘와 재실****을 짓고,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선생의 청렴 정신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명종 임금이 하사하신 99칸 집 청백당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장성군은 이곳에서 가까운 홍길동테마파크에 99칸 집을 재현하여 지어 ‘청백당’ 현판을 걸고, ‘청백한옥’이라는 이름으로 한옥체험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앞에는 박수량 선생의 유허비*****와 하마석******이 있다.


  • 부조묘(不祧廟):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
  • 시호(諡號):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임금으로부터 받은 이름
  • 청백리(淸白吏): 청렴결백한 관리
  • 재실(齋室):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 유허비(遺墟碑):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 하마석(下馬石):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이용하는 디딤돌

영문

Birthplace and Shrine of Bak Su-ryang

This site in Agok-ri Village was the birthplace of Bak Su-ryang (1491-1554),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site is now commemorated with a shrine built by his descendants.

Bak Su-rya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14 and held various positions over 38 years, including posts at the Ministry of Taxation, Ministry of Rites, Ministry of Punishment, and the Ministry of Public Works, as deputy mayor of the capital region, and as governor of Hamgyeong-do and Jeolla-do Provinces. Bak was known for his filial piety and was bestowed with the title of Pure and Untarnished Official (Cheongbaengni) for his honorable character. His posthumous title, Jeonghye, means "uncorrupted benevolence" and conveys his integrity and love toward the common people.

It is said that King Myeongjong (r. 1534-1567) wanted to confirm whether Bak Su-ryang truly lived an upright life, so he sent a secret inspector to Bak Su-ryang's hometown. The secret inspector reported that "Bak Su-ryang's home has a thatched roof, is leaking in many places, and showed no smoke coming out of the chimney for half a month." To commemorate Bak Su-ryang's integrity, the king is said to have ordered that his home be renovated into a large property named Cheongbaekdang, meaning "Hall of Pure and Untarnished (Character)." This estate is said to have burned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7-1598.

King Myeongjong is also said to have helped finance Bak's funeral expenses, as Bak died in the capital without any funds to his name. When Bak's tombstone was to be erected, the king is said to have remarked that "Attempting to inscribe Bak Su-ryang's integrity on this tombstone may result in his integrity being poorly conveyed , so erect it without an inscription." The tombstone, located at Bak's tomb in the nearby village of Geumho-ri, is designated as a Jeollanam-do Monument No. 198.

At the Hong Gil-dong Theme Park in Jangseong, there is a large traditional house complex built in 2010 that was named Cheongbaek Hanok in commemoration of Bak Su-ryang's legacy as a native of Janseong.


  • 명종은 아니고 후손들이 비문 없이 새웠다는 말고 있어서 사실 확인 필요해요.
  • 이 사당 언제 지었는지?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 박수량(1491-1554)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박수량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사당과 재실이 있다.

박수량은 1514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38년 동안 호조·예조·형조·공조의 벼슬, 한성부판윤, 함경도·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청렴한 관직 생활로 청백리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박수량의 시호 ‘정혜’는 ‘청렴결백하였고,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이 친부모처럼 따랐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박수량의 청렴결백한 생활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명종(재위 1545-1567)은 박수량의 청렴결백한 생활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박수량의 고향인 아곡리 마을에 암행어사를 보냈다. 암행어사는 “박수량의 고향 집은 비가 새는 초가이며, 한 달 중 절반 동안은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라고 보고하였다. 임금은 박수량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아곡리에 대규모의 저택을 지어 주고, ‘청백당’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박수량이 한양에서 세상을 떠난 후 고향에 내려올 장례비조차 없자, 임금은 장례비를 지원했다. 그리고 묘비를 내려보내면서 “박수량의 청백함을 새삼스럽게 비에 새기는 것은 그의 청렴함을 잘못 서술하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워라”하여, 박수량의 묘 앞에는 비문 없는 묘비가 세워졌다. 박수량의 묘는 황룡면 금호리에 있고, 묘비는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하사한 청백당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장성군에서는 홍길동테마파크에 청백당을 재현한 한옥을 지어, ‘청백한옥’이라는 이름으로 한옥체험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청백한옥 앞에는 박수량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