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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nta Chambers of King Sejong’s Sons, S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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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centa chamber is where a nested jar containing a royal baby’s placenta and umbilical cord were enshrined. During the Joseon dynasty, a newborn baby's placenta was regarded as the origin of life, and preserving it would ensure a healthy, advantageous life for the child. Because this was especially important to the royal family, they took great effort to find the most auspicious place and time to build a placenta chamber. The whole process was carried out according to strict procedures because it was believed that the fate of the country closely relied on how the royal placenta was regarded. This ritual of placenta chamber construction is unique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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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site of placenta chambers of nineteen people, i.e. eighteen sons of King Sejong (r. 1418-1450), the 4th ruler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one of his grandsons, King Danjong (r. 1452-1455). These placenta chambers were built between 1438 and 1442. Usually, a placenta chamber is a singular structure, which makes this site truly unique because of the great number of placenta chambers concentrated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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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Japanese authorities destroyed the Joseon royal family's placenta chambers and relocated most of the placenta jars to West Three Royal Tombs in Goyangi, Gyeonggi-do Province. However, this site avoided destruction and was preserved in its original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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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6일 (월) 05:49 판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Placenta Chambers of King Sejong’s Sons, Seongju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영문명칭 Placenta Chambers of King Sejong’s Sons, Seongju
한자 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지정번호 사적 제444호
지정일 2003년 3월 6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조선시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5,950㎡
웹사이트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태실이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씻어서 태항아리에 담아 봉안**한 곳을 말한다.

태를 묻는 과정인 장태(藏胎)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며 왕의 태를 묻었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면서 왕자와 공주의 태를 묻었다. 조선 초기부터 장태 의례는 왕실의 주요 의례였으며 엄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태가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명당인 이곳의 태봉까지 태를 옮겨 태실을 조성한 것은 태어난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동시에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장태 의례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면서 점차 간소화되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세종 20년(1438)에서 세종 24년(1442)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세종의 아들 18명과 손자인 단종을 합쳐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다. 보통 1기씩 조성되어 따로 떨어져 있는 태실과는 달리, 이곳에는 많은 수의 태실이 모여 있는데, 전국 어디에도 이런 규모의 태실은 없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태실이 일본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일부 옮겨졌을 때에도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제자리를 지켜 옛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조선 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왕실의 태실 조성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태(胎):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이르는 말
  • 봉안(奉安):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그릇이나 봉안당에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아기의 태를 담아 모시는 것을 뜻한다.

영문

Placenta Chambers of King Sejong’s Sons, Seongju

A placenta chamber is where a nested jar containing a royal baby’s placenta and umbilical cord were enshrined. During the Joseon dynasty, a newborn baby's placenta was regarded as the origin of life, and preserving it would ensure a healthy, advantageous life for the child. Because this was especially important to the royal family, they took great effort to find the most auspicious place and time to build a placenta chamber. The whole process was carried out according to strict procedures because it was believed that the fate of the country closely relied on how the royal placenta was regarded. This ritual of placenta chamber construction is unique to Korea.

This is the site of placenta chambers of nineteen people, i.e. eighteen sons of King Sejong (r. 1418-1450), the 4th ruler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one of his grandsons, King Danjong (r. 1452-1455). These placenta chambers were built between 1438 and 1442. Usually, a placenta chamber is a singular structure, which makes this site truly unique because of the great number of placenta chambers concentrated her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Japanese authorities destroyed the Joseon royal family's placenta chambers and relocated most of the placenta jars to West Three Royal Tombs in Goyangi, Gyeonggi-do Province. However, this site avoided destruction and was preserved in its original form.

영문 해설 내용

태실은 왕실에서 자녀의 태(胎)를 봉안한 태항아리를 모신 석실이다. 조선시대에 태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졌고, 태를 잘 보존하면 자녀의 건강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조선 왕실에서는 명당을 물색하고 길일을 가려 태를 봉안하였다. 모든 과정은 엄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이는 태를 잘 모시는 것이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실을 세우는 이러한 의식은 한국에 유일하다.

이곳에는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재위 1418-1450)의 아들 18명과 손자 단종(재위 1452-1455)까지 총 19인의 태실이 모여있다. 이 태실들은 1438년에서 1442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태실이 1기씩 따로 조성되는 것과 달리, 여러 기의 태실이 함께 모여 유례없는 규모를 자랑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조선왕조의 태실들을 훼손하고 일부 태항아리를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은 훼손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태실 기본 설명은 기존 설명과 약간 다름. 국문 내용을 일부 추가했음.

참고자료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333704440000 ->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왕의 위업은 태 마저도 명당에,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이야기 옷을 입은 경북 문화재 기행』, 문화재청, 2010
  • [성주여행] 가볼만한곳 “세종대왕자 태실”, 천국나그네의 세상여행,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jagger0723/221110930171 -> 안내판, 배치도 사진 확인
  • (참고)단종과 경혜공주를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May-be,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wlgnszhcl88/221366324734 -> 자녀로는 하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두었으며 그녀가 영풍군을 키우고 있을 당시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이튿날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문종에게 알려 세자빈의 소생인 경혜공주와 단종을 혜빈에게 맡기기로 하였다고 함. / 혜빈은 1455년 12월 17일 세조의 명에 의해 교수형을 당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혜빈 양씨의 세 아들 중 먼저 생을 뜬 2남 수춘군을 제외하고 1남 한남군은 금산 유배지에서 병사하였고 3남 영풍군은 살해당하였다고 해요.


  • 사각형의 바닥돌은 땅을, 둥근 지붕돌은 하늘을 의미하며, 원기둥 모양의 몸돌은 사람을 상징한다고 한다. 바닥돌과 지붕돌은 각각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이곳에는 맏아들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들의 태실이 모여 있다.
  • 세조의 즉위를 반대했던 다섯 왕자는 금성대군, 안평대군, 한남군, 수춘군, 화의군이다. 한남군과 수춘군의 생모는 혜빈 양씨로, 세종의 후궁이었던 그녀는 단종과 경혜공주를 실질적으로 양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