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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리 도요지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조선 후기의 백자 및 도기 가마가 밀집해 있는 유적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마는 니구산(해발 378m)의 남서쪽 구릉 해발 60m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 구룡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곳까지도 가마터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태토의 수급, 연료 확보, 생산된 물품의 유통 등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도자기 전문 생산 단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천리 도요지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조선 후기의 백자 및 도기 가마가 밀집해 있는 유적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마는 니구산(해발 378m)의 남서쪽 구릉 해발 60m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 구룡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곳까지도 가마터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태토의 수급, 연료 확보, 생산된 물품의 유통 등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도자기 전문 생산 단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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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도기 가마 4기가 조사되었다. 1호와 1-1호 가마는 천장이 붕괴된 상태였고, 2호는 절반 가까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으나 천장이 무너지지 않아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었다. 3호는 가까운 곳에 민묘가 조성되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아있는 규모로 보아 길이 10m, 너비 7m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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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녹갈색 혹은 흑갈색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 병, 주전자, 사발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릇 종류가 대부분이다. 출토된 도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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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리 도요지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조선 후기의 백자 및 도기 가마가 밀집해 있는 유적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마는 니구산(해발 378m)의 남서쪽 구릉 해발 60m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 구룡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곳까지도 가마터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의 수급, 연료 확보, 생산된 물품의 유통 등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도자기 전문 생산 단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들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도기 가마 4기가 조사되었다. 1호와 1-1호 가마는 천장이 붕괴된 상태였고, 2호는 절반 가까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으나 천장이 무너지지 않아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었다. 3호는 가까운 곳에 민묘가 조성되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아있는 규모로 보아 길이 10m, 너비 7m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들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도기 가마 4기가 조사되었다. 1호와 1-1호 가마는 천장이 붕괴된 상태였고, 2호는 절반 가까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으나 천장이 무너지지 않아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었다. 3호는 가까운 곳에 민묘가 조성되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아있는 규모로 보아 길이 10m, 너비 7m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 5월 13일 (목) 03:24 판


사천우천리도요지
사천 우천리 도요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사천우천리도요지
한자 泗川牛川里陶窯址
주소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1380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33호
지정일 2001년 5월 3일
분류 유적건조물/산업생산/요업/도자기가마
관리자 사천시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37,664㎡
웹사이트 사천 우천리 도요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니구산(해발 378m)의 말단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경사 아래의 해발 60m 구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아래쪽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구룡저수지의 수변에 해당된다. 도요지가 자리잡고 있는 범위는 350m 길이에 폭이 100m 정도이나 상당부분 저수지 물아래에 잠겨 있다.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곳에서 녹갈유와 흑갈유의 도기(옹기)를 제작한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항아리, 병, 주전자, 사발 등으로 주로 생활용기들로 당시 일반인 들이 손쉽게 사용하였던 것들이다. 여기서 출토된 가마터는 길이 10m, 폭 70cm 정도와 길이 6m, 폭 120cm 정도 등 2기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벽체를 2~3차례 보강한 흔적이 있으며 유적내의 곳곳에는 상당량의 벽체편이 확인되어 다수의 가마터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민묘와 경작으로 인해 많은 가마터가 훼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도기는 경남지역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한 도기가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6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주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옹기를 주로 제작하던 가마터이다.

이곳에서는 2002년에 실시된 시굴 조사를 통해 벽체를 두세 차례 보강한 흔적이 남아있는 2기의 가마가 확인된 바 있다.

조사 당시 곳곳에서 가마의 벽체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많이 확인되었지만, 이미 무덤과 경작지로 훼손되어 있었다. 현재 확인되는 가마터는 구릉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길이 약 350m, 폭 약 100m 가량의 범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1950년 구룡저수지를 조성하면서 수몰된 곳까지 가마터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면적 또한 꽤 넓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발견된 유물들은 녹갈색 혹은 흑갈색이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 병, 주전자, 사발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릇 종류가 대부분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도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지역 도자기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 『泗川 牛川里 陶窯址』(경남문화재연구원, 2005) 단행본 자료 있으나 인터넷으로 열람 불가 -> 확인 필요.
  • 가마터 면적에 대한 확인 필요 -> 기존 문안:350m 길이에 폭이 100m / 문화재청: 구릉면을 따라 길이 200여m, 폭 약 30m
  • 구룡저수지가 조성된 것이 ‘1950’년이라고 하므로, 2002년 조사는 노출된 구역만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함.
  • 우천리 도요지는 1996년 8월 초 김남진이 발견하였다.

1차 수정

우천리 도요지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조선 후기의 백자 및 도기 가마가 밀집해 있는 유적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마는 니구산(해발 378m)의 남서쪽 구릉 해발 60m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 구룡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곳까지도 가마터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태토의 수급, 연료 확보, 생산된 물품의 유통 등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도자기 전문 생산 단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들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도기 가마 4기가 조사되었다. 1호와 1-1호 가마는 천장이 붕괴된 상태였고, 2호는 절반 가까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으나 천장이 무너지지 않아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었다. 3호는 가까운 곳에 민묘가 조성되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아있는 규모로 보아 길이 10m, 너비 7m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녹갈색 혹은 흑갈색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 병, 주전자, 사발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릇 종류가 대부분이다. 출토된 도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문의견

2차 수정

우천리 도요지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조선 후기의 백자 및 도기 가마가 밀집해 있는 유적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마는 니구산(해발 378m)의 남서쪽 구릉 해발 60m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 구룡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곳까지도 가마터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의 수급, 연료 확보, 생산된 물품의 유통 등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도자기 전문 생산 단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들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도기 가마 4기가 조사되었다. 1호와 1-1호 가마는 천장이 붕괴된 상태였고, 2호는 절반 가까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으나 천장이 무너지지 않아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었다. 3호는 가까운 곳에 민묘가 조성되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아있는 규모로 보아 길이 10m, 너비 7m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녹갈색 혹은 흑갈색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 병, 주전자, 사발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릇 종류가 대부분이다. 출토된 도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사천_우천리_도요지 Place 사천_우천리_도요지
J38-0233-0000 Heritage (경상남도_기념물_제233호)_사천_우천리_도요지
2002년_시굴조사 Event 2002년_시굴조사
구룡저수지 Place 구룡저수지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사천_우천리_도요지 J38-0233-0000 isDesignatedAs
사천_우천리_도요지 2002년_시굴조사 isRelatedTo
사천_우천리_도요지 구룡저수지 isRelatedTo


참고자료

  • 사천 우천리 도요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330000 → 이곳에서 지표채집된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전기의 분청사기와 조선시대 후기(17-18세기)의 백자와 옹기를 생산하였던 지방요로 추정되고 있다. 사남면 우천마을의 구룡못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부는 구룡못 물속에 잠겨 있다. 가마터는 구릉면을 따라 길이 200여m, 폭 약 30m로 구룡못의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까지 한다면 그 면적이 꽤 넓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에는 가마 벽체의 일부분과 분청사기, 자기, 옹기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이 지역의 도자기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우천리 유적”,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생산유적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1064~1065쪽.
  • '명품마을' 혁신을 찾아서 <19> 사천 우천바리안마을, 국제신문, 2020.10.4.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201005.22013000073 →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마을은 ‘배부른 소가 냇가에서 쉬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 이 마을은 1950년 마을 앞에 대규모 저수지가 생기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비옥했던 논밭이 수몰되자 100가구가 넘던 주민은 사남면 소재지나 사천읍 등지로 이주했고 35 가구만 마을에 남았다.
  • 우천리 도요지(牛川里 陶窯地), 사천시사 제11편 문화재, 향토역사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http://jdpaper.ciclife.co.kr/sub.html?w=body_01_01&style=01&idx=951&num=3524&search=&_view=view →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산 4번지 1 일대 구룡저수지 못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마터로 요벽체와 소토층, 자기편 등이 상당수 확인되어 도요지임을 확인했다. 지표상의 유물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 전기의 분청사기와 17∼18세기의 자기와 옹기를 생산하였던 지방민요로 추정되는 대형 가마터로 도자사(陶磁史) 학술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명되었다. / 우천리 도요지는 1996년 8월초 김남진(사천문화신문사 발행인 : 현 가야비파구룡요 경영)이 발견하여 학계· 행정 등에서 조사한 결과 고려초부터 조선중기까지 생산된 민요가마터로 판명되었다. 이 가마의 형태는 고려 초의 형식인 땅굴터널식으로 약 100m사이에 수십개(???) 집단적 가마터이며 발견된 파편은 녹유· 흑유· 분청· 막백자 등과 옹기류도 수집된 바 있으며 맞은편에는 기와를 굽던 기와가마터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근거 확인 필요) / 이 가마터를 최초로 발견하여 지금까지 연구하여 온 김남진의 노력에 의해 이곳에서 나는 흙과 유약을 찾아 실험을 해 본 결과 이곳의 흙과 유약만으로 일본 국보인 이도차완과 똑같은 비파색을 재현해 내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이곳에서 그릇을 굽다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사기장이 일본에 끌려가 일본 아가노야끼(上野燒)를 개요한 도공 존개의 뿌리를 찾게 된 가마터(관련자료 없으므로 확인 필요함)이기도 하다.
  • 사천 우천리 도요지, 재봉틀의 국어방, 네이버 블로그, 2014. 8. 13. https://blog.naver.com/kwank99/220090384204 → 사천시와 경상남도는 2000년부터 옛 가마터 보존과 발굴에 나섰다. 사천시와 경남문화재연구원은 2002년 구룡저수지 언덕의 옛 가마터를 발굴해, 우선적으로 4개의 가마터를 확인했다.(???) 발굴 당시 사발 1개와 녹색을 띤 주병 파편 등 상당수 도자기 조각들이 나왔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이 곳 가마터가 지어진 시기를 16~17세기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