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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건물지에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만든 깊이나 크기가 다른 기둥 구멍이 여럿 발견되었다. 이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다수의 백제 기와, 토제 벼루 조각, 삼족토기 조각, 기대 조각, 소형 주발 조각, 토제 등잔 조각 등이 있다.
 
각 건물지에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만든 깊이나 크기가 다른 기둥 구멍이 여럿 발견되었다. 이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다수의 백제 기와, 토제 벼루 조각, 삼족토기 조각, 기대 조각, 소형 주발 조각, 토제 등잔 조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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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굴건식 건물이 있던 곳이다. 1990년 발굴조사를 통해 이 일대에서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를 확인하였으며, 475년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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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35m, 남북 20m의 범위에서 굴건식 건물의 기둥 구멍으로 보이는 원형 또는 방형의 깊이가 다른 구멍 100여 개가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이 대부분 겹쳐 있어 건물의 숫자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북쪽에서 발견된 건물지는 전면 18m, 측면 5m에 이르는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다수의 백제 기와, 흙으로 만든 벼루 조각, 삼족 토기 조각, 그릇 받침 조각, 소형 그릇 조각, 흙으로 만든 등잔 조각 등이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1년 5월 13일 (목) 03:00 판

백제건물지 百濟建物址
Goto.png 종합안내판: 공주 공산성



해설문

기존 국문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 직접 기둥을 세운 굴건식((掘建式) 건물터이다. 1990년 발굴 조사로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를 확인하였다.

이 건물터는 475년에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건물이 세워졌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웅진천도 이전의 공산성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1차 수정

백제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굴건식 건물이 있던 곳이다. 1990년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를 확인하였으며, 475년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 건물지에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만든 깊이나 크기가 다른 기둥 구멍이 여럿 발견되었다. 이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다수의 백제 기와, 토제 벼루 조각, 삼족토기 조각, 기대 조각, 소형 주발 조각, 토제 등잔 조각 등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각 건물지에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만든 깊이나 크기가 다른 기둥 구멍이 여럿 (여러개) 발견되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이 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굴건식 백제건물지로 1990년 공산성 내 쌍수정 앞 광장에 대한 추정 왕궁지 발굴조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동서 35m, 남북 20m의 범위에서 굴건식건물의 기둥구멍으로 보이는 원형 또는 방형의 깊이가 다른 구멍 100여개가 확인되었다. 대부분 기둥구멍이 중복되어 있어 건물의 숫자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조사지 가장 북쪽에서는 전면 18m, 측면 5m에 이르는 8칸 규모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건물의 기둥구멍의 간격은 2.4m×5m로 동서로 열을 맞추어 있는데 열을 따라 배수홈도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를 확인하였으며, 이 일대에서 다수의 백제기와, 토제 벼루 조각, 개배 조각, 삼족토기 조각, 기대 조각, 소형 주발 조각, 토제 등잔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475년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에 조성된 백제건물지로 추정하고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자료를 보면 백제건물지는 반지하식, 굴건식,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 등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현재 첫문장에 ‘백제건물지는~’는 표현은 백제건물지가 모두 굴건식이라는 얘기로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면 ‘1990년 발굴조사를 통해 이 일대에서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가 확인됐다. 이 건물터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굴건식 건물의 흔적이다.’같은 식으로 정리가 되면 더 좋을 듯 합니다.
    • 공주대 박물관 자료를 보면 '주공 안에서나 또는 홈 안에서는 기와류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 본다면 이 건물에는 기와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며, 굴건식 건물을 폐쇄한 후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을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굴건식 주공 사용 건물은 백제가 남천하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정보가 좀더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유적 자체가 터만 있는데다 공법도 굴건식이라는 낯선 방식이어서 안내문의 내용이 좀더 알차야 유적에 대한 관심과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 쉬운 어휘 사용 -> '기대 조각' - 사전 찾아도 안 나오므로 다른 단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을 듯 / '주발'-> '밥그릇' / '토제'->'흙으로 만든'

2차 수정

이 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굴건식 건물이 있던 곳이다. 1990년 발굴조사를 통해 이 일대에서 건물터 2곳과 구덩이 9개를 확인하였으며, 475년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 35m, 남북 20m의 범위에서 굴건식 건물의 기둥 구멍으로 보이는 원형 또는 방형의 깊이가 다른 구멍 100여 개가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이 대부분 겹쳐 있어 건물의 숫자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북쪽에서 발견된 건물지는 전면 18m, 측면 5m에 이르는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다수의 백제 기와, 흙으로 만든 벼루 조각, 삼족 토기 조각, 그릇 받침 조각, 소형 그릇 조각, 흙으로 만든 등잔 조각 등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