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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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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5월 16일 (일) 17:17 판 (수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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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류홍 부자 묘역
Tombs of Ryu Sun-jeong and Ryu Hong
류순정·류홍부자묘역, 서울의 문화재, 서울역사편찬원.
대표명칭 류순정·류홍 부자 묘역
영문명칭 Tombs of Ryu Sun-jeong and Ryu Hong
한자 柳順汀·柳泓 父子 墓域
주소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산43-32번지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2호
지정일 2004년 8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분묘 3基, 석물 24基, 토지 896.3㎡
웹사이트 류순정·류홍부자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문중 작성 초안

이곳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류순정(柳順汀 1459~1512)과 부인 정경부인 안동권씨의 묘, 훈련원도정을 지낸 아들 류홍(柳泓 1483~1551)과 부인 증정경부인 풍양조씨와의 합폄묘와 계비인 증정경부인 평창이씨의 묘가 있는 묘역이다, 또한 이곳에는 류홍의 아들 온양군수 사필(師弼), 손자 군자감정 준(浚), 증손 증좌승지 중광(重光), 현손 진성군 순(焞), 6대손 진흥군 식(寔)의 묘가 있다.

류순정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7년(성종18)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국1등공신에 녹훈되어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재직시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로 출정하여 삼포왜란을 평정하였고 1512년(중종7) 영의정에 오른후 그해 12월에 향년 5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의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류홍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국4등공신에 녹훈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도정, 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냈으며 진산군에 봉군되었다. 1551년(명종6) 향년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후에 숭정대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이곳에는 1567년(명종22)에 세워진 류순정의 신도비와 1573년(선조6)에 세워진 류홍과 류사필의 신도비가 있는데 모두 농대가첨석(籠臺加檐石)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류순정과 류홍의 묘갈은 운룡문(雲龍紋)형이고 안동권씨 묘갈은 운문(雲紋)형이다. 류순정 묘역에 있는 동자석은 연판문 대좌 위에 맨발로 서 있는 모습으로 세웠졌는데 옷의 주름이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류순정과 류홍의 묘역은 1500년대에 조성되어 원형대로 잘 보존된 서울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부자공신(父子功臣)묘역으로서 이들 분묘와 석물들은 조선시대 공신이며 사대부가의 대표적인 묘역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이다.

수정안

류순정의 묘

이곳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류순정(柳順汀, 1459~1512)과 부인 안동권씨의 묘, 아들 류홍(柳泓, 1483~1551)과 부인 풍양조씨의 합장묘가 있는 묘역이다.

류순정과 류홍 부자는 모두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 묘역은 오늘날 서울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자 공신 묘역이다. 16세기에 조성된 류순정과 류홍 부자의 묘역은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어, 석물의 배치를 비롯한 묘역의 조성 형태를 통해 조선시대 공신이자 사대부가 묘역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3기의 묘 외에도, 이 묘역에는 류홍의 계배(繼配: 두 번째 부인)인 평창이씨의 묘, 류홍의 아들 온양군수 사필(師弼), 손자 군자감정 준(浚), 증손 증좌승지 중광(重光), 현손 진성군 순(焞), 6대손 진흥군 식(寔)의 묘가 있다.

  • 류순정의 묘

류순정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조선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성종 18년(1487)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연산군 때에는 간신들의 잔악함과 권력 남용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중종 1년(1506)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우의정과 병조판서를 거쳤고, 중종 2년(1507) 일어난 역모를 진압한 공로로 다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중종 5년(1510) 3포(부산포, 제포, 염포)에서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도원수(都元帥)로서 군대를 통솔하여 왜란을 평정하였고, 중종 7년(1512)에는 마침내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류순정의 묘역에는 2기의 봉분이 있는데, 앞뒤로 각각 부인 안동권씨와 류순정의 묘이다. 각 봉분 앞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으며, 류순정의 묘갈은 용과 구름 문양이, 안동권씨의 묘갈은 구름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머릿돌을 얹었다. 이 밖에도 혼유석, 상석, 동자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묘역 입구에는 류순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 22년(1567)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한성부 판윤 강혼(姜渾, 1464~1519)이 1513년에 지었고, 글씨는 학자이자 이름난 서예가였던 송인(宋寅, 1517~1584)이 썼다.

류순정의 묘에서 서남쪽으로 약 150여 미터 떨어진 능선에 류홍을 비롯한 진주류씨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류홍의 묘

이곳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류순정(柳順汀, 1459~1512)과 부인 안동권씨의 묘, 아들 류홍(柳泓, 1483~1551)과 부인 풍양조씨의 합장묘가 있는 묘역이다.

류순정과 류홍 부자는 모두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 묘역은 오늘날 서울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자 공신 묘역이다. 16세기에 조성된 류순정과 류홍 부자의 묘역은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어, 석물의 배치를 비롯한 묘역의 조성 형태를 통해 조선시대 공신이자 사대부가 묘역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3기의 묘 외에도, 이 묘역에는 류홍의 계배(繼配: 두 번째 부인)인 평창이씨의 묘, 류홍의 아들 온양군수 사필(師弼), 손자 군자감정 준(浚), 증손 증좌승지 중광(重光), 현손 진성군 순(焞), 6대손 진흥군 식(寔)의 묘가 있다.

  • 류홍의 묘

류홍은 중종 대의 명재상이었던 류순정의 맏아들이다. 류홍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중종 1년(1506)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워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중종 6년(1511)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도정,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류홍의 묘는 묘갈, 혼유석,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을 갖추었다. 묘갈은 용과 구름 문양을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신도비는 류홍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6년(1573)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좌의정 홍섬(洪暹, 1504~1585)이 짓고, 글씨는 학자이자 이름난 서예가였던 송인(宋寅, 1517~1584)이 썼다.

류홍과 부인 풍양조씨의 합장묘 아래에는 진주류씨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류홍의 계배인 평창이씨의 묘가 있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6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류순정과 부인 안동권씨의 묘가 있다.

영문

Tombs of Ryu Sun-jeong and Ryu Hong

These are the tombs of the civil official Ryu Sun-jeong (1459-1512), his son Ryu Hong (1483-1551), and their wives. This is the only extant cemetery in the Seoul area to inter a father and son who were both meritorious subjects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Ryu Sun-jeong was a student of Kim Jong-jik (1431-1492), a representative scholar of the Sarim literati faction. In 1487, Ryu placed first in the state examination and went on to serve various official posts.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r. 1495-1506), he critiqued the atrocities and abuses of power committed by disloyal subjects. In 1506, Ryu aided King Jungjong (r. 1506-1544) in taking the throne, for which he was made a meritorious subject. He then served as third state councilor and minister of war. In 1507, he helped suppress a revolt, for which he was made a meritorious subject once again. In 1510, he led troops to battle to suppress a war started by Japanese pirates illegally residing at southern trading ports. And in 1512, just before his death, he was promoted to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position in the government.

Ryu Hong was skilled in the martial arts from a young age. In 1506, he also supported King Jungjong's ascent to the throne, for which he was made a meritorious subject. In 1511,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for military officials, after which he held various official posts.

The burial mound of Ryu Sun-jeong is located behind that of his wife, Lady Kwon of the Andong Kwon Clan. In front of each burial mound is a tombstone. The tombstones have elaborately engraved capstones; That of Ryu features dragon and cloud designs, while that of Lady Kwon features only cloud designs. There are also various stone structures in front of the burial mounds including a spirit seat, a table, an incense table, a statue of a child attendant, a post, and a lantern. At the entrance to the tomb area is a stele erected in 1567 that records Ryu Sun-jeong's life and achievements.

The burial mound of Ryu Hong is located about 80 m to the southwest of his father's tomb. Ryu Hong is interred in the same burial mound as his first wife, Lady Jo of the Pungyang Jo Clan. Between the tombs of Ryu Hong and his father is the burial mound of Ryu Hong's second wife, Lady Yi of the Pyeongchang Yi Clan. The tombstone in front of Ryu Hong's burial mound also features a capstone engraved with dragon and cloud designs. The stele honoring his life and achievements was erected in 1573.

This 16th-century cemetery has been preserved in relatively good condition. The placement of the stone structures as well as the overall layout of the cemetery is representative of cemeteries of the upper-class and meritorious subjects of the Joseon period. On the hill below Ryu Hong's tomb are the tombs of some of his descendants, including his son Ryu Sa-pil, grandson Ryu Jun, great-grandson Ryu Jung-gwang, great-great-grandson Ryu Sun, and great-great-great-great-grandson Ryu Sik.


  • 삼포왜란은 좀 다르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일단 남부 지역에 왜 일본인들이 있었는지, 어떤 일본인들이었는지 등 성명해야지 말이 돼요~ 근데 war로 해야할지, riot/uprising 더 맞을지 고민이 되네요.
  • 원래 6대손은 6th-generation descendant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앞에 great-grandson 등이 있어서 그냥 일관성 있게 썼어요.
  • 석물의 개수 확인 부탁 (단수, 복수)

영문 해설 내용

이 묘역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류순정(1459-1512)과 부인 안동권씨의 묘, 아들 류홍(1483-1551)과 부인 풍양조씨의 합장묘, 류홍의 계배(繼配, 두번째 정부인)인 평창이씨의 묘가 있다. 류순정과 류홍은 모두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 묘역은 오늘날 서울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자 공신 묘역이다.

류순정은 조선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이며, 1487년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연산군 때에는 간신들의 잔악함과 권력 남용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1506년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이후 우의정과 병조판서를 거쳤고, 1507년 일어난 역모를 진압한 공로로 다시 공신에 책록되었다. 1510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머물던 남부 지역에서 일본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왜란을 평정하였다. 1512년 마침내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류홍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1511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류순정의 묘는 부인 안동권씨의 묘 뒤쪽에 조성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으며, 류순정의 것은 용과 구름 문양이, 안동권씨의 것은 구름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머릿돌을 얹었다. 이 밖에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물을 갖추었고, 묘역 입구에는 류순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67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류순정 묘에서 서남쪽으로 약 8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류홍과 부인 풍양조씨의 합장묘가 있고, 류순정의 묘와 류홍의 묘 사이에는 류홍의 계배인 평창이씨의 묘가 있다. 류홍의 묘갈 역시 용과 구름 문양을 새긴 머릿돌을 얹었고, 신도비는 1573년에 세웠다.

16세기에 조성된 이 묘역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석물의 배치를 비롯한 묘역의 조성 형태를 통해 조선시대 공신이자 사대부가 묘역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류홍 묘의 아래에는 류홍의 아들 류사필, 손자 류준, 증손 류중광, 4대손 류순, 6대손 류식의 묘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