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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용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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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12월 6일 (월) 07:52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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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용산성
독용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독용산성
한자 禿用山城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171-1번지 외 9필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105호
지정일 1995년 1월 14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시대미상
수량/면적 169,493㎡
웹사이트 독용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독용산성은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부에 있는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7.7km에 이르며, 산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활용 공간이 넓다.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영남 지방에 있는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산세가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땅이 평탄하여 전쟁에 대비한 성곽의 기능을 가졌다. 지금은 웅장했던 성곽 일부와 아치형의 동문이 복원되어 있다.

산성이 처음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가야 때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하여 고려 시대 토성으로 쌓은 산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조선 숙종 1년(1675) 관찰사 정중휘가 주도하여 고쳐 쌓은 기록이 있다.

고쳐 쌓을 당시 동문, 남소문, 전쟁 시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將臺),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포루(砲樓), 창고 등의 건축물이 갖추어졌었다. 조선 말기에 군사적인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들이 허물어지고 현재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한 군기고에서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 : 성내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산성

영문

Dokyongsanseong Fortress

Dokyongsanseong is a stone fortress encircling the top of the Dokyongsan Mountain (955 m above the sea level). The fortress measures approximately 7.7 km in circumference and is one of the largest fortresses in Gyeongsang-do region.

Despite the fortress being located high on rugged mountainous terrain, the land encircled by it is flat, which makes it easier to utilize, and the water source is abundant. Those are particularly advantageous conditions for a fortress when preparing for war or long battles.

It is unknown when the fortress was originally constructed but it is presumed that it dates back to Gaya confederacy (42-562). There are traces of it being rebuilt as an earthen fortification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the fortress was repaired and greatly expanded in 1675. At that time, various structures were added, such as the eastern gate, small southern gate, command post*, bastions**, and an armory. At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fortress lost its military importance and became abandoned.

Excavation conduc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confirmed a number of artifacts on the site of the armory, including iron axes, iron spears, iron arrows, tridents, horse saddles, and armor.*** Reconstruction of the fortress began in 1997 and part of the fortress wall and arched estern gate were built anew.


  • I didn’t translate the descriptions, I guess the names are quite straightforward
    • or is it a “bastion pavilion”?
      • plura? singular?

영문 해설 내용

독용산성은 독용산(해발 955m)의 정상부를 둘러 쌓은 석성이다. 둘레는 약 7.7㎞로, 경상도 지방에 있는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산세가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성 내부의 땅이 평탄하고 물이 풍부하며 활용 공간이 넓다. 이는 전쟁이나 장기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성곽으로서 유리한 조건이다.

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 토성으로 고쳐 쌓은 흔적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675년 큰 규모로 고쳐 쌓았으며. 이때 동문, 남소문,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포루, 군기고 등을 갖추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군사적인 필요성이 줄어들자 방치된 채 남아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군기고 터에서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1997년부터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성곽 일부와 아치형의 동문이 새로 지어졌다.

참고자료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83. 성주 독용산성, 대경일보, 2021.5.25.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4291 -> 독용산성은 성산가야 건국 세력이 쌓은 산성이다. 성안에서 출토된 가야시대 토기파편이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 1997년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일부 구간이 복원돼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중 아치형 동문은 누각 관성루가 완벽하게 복원돼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성곽을 따라가면 서, 남, 북에도 성문 자취가 역력하다. 일정 구간마다 대포를 설치하던 포루와 망루도 흔적이 잘 남아 있다. 동, 남쪽에는 암문 터 3개소가 있다. 계곡 쪽 성곽아래에는 수구문 터 1개소가 남아 있다. 객사 터, 군기고 터 , 창고 터, 안국사 터 등도 보인다. 무엇보다 식수를 공급하던 연못 4개소, 우물 2개소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성안 군기고 터에서는 말안장과 갑옷, 창과 화살 등 다양한 유물을 발굴했다고 한다. 독용산성은 가야시대 이후 비워져 있다가 임진왜란때 피난민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한다. 이 후 조선 숙종 1년(1675년) 순찰사 정중휘가 개축했다. / 동문 안쪽에는 조선 후기 세운 비석 4기가 단 위에 나란히 서 있다. 모두 지방관리의 치적을 기리려는 흔한 불망비, 선정비 등이다. / 서문 터와 북문 터 안쪽은 분지 지형이다. 옛 관아가 있었던 자리인지 객사와 군기고 터 등이 보인다. 숲길 옆에는 벽진 이씨 시조 이총언(李悤言)을 기리는 벽진 장군 대첩비도 서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휘하에서 후백제 견훤의 장자 신검을 물리친 전승 기념비라고 한다.
  • 독용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701050000 ->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계곡을 포함하여 산정을 두른 형태를 포곡식이라 하는데, 영남지방의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전쟁의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이기도 하다.
  • [길, 경북을 걷다] 성주 독용산성길, 경북일보, 2018.12.26., 네이버 포스트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433496&memberNo=15957319&vType=VERTICAL -> 출토유물로 볼 때 1500여년 전인 4세기 중엽 성산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피난을 가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 [상생의 땅 가야산](40)독용산성, 매일신문, 2008.4.14. http://news.imaeil.com/page/view/2008041407352255379 -> 독용산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출토유물 등으로 미뤄 1천500여년 전인 5세기쯤 성산가야에서 처음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산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 독용산성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 동안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던 것.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을 피하던 백성들에 의해 독용산성이 발견됐고, 그 가치가 새삼 주목을 받게 됐다. 나라에서는 산의 형세가 험해 병란을 피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하고, 숙종 원년에 성을 개축하기 시작해 그 다음 해에 완성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독용산성 개축에 대한 여러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992년에는 대구대박물관에 의해 독용산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뤄졌다. 그에 따르면 성안 면적은 1.175㎢이며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잘라 축조했다. /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서남북의 네 포루(砲樓), 동문(東門), 수구문(水溝門), 남소문(南小門) 등이 있었으며 합천과 거창의 군병 등을 배속하는 등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성을 관리하기 위해 객사(客舍), 동·서 창고, 군기고(軍器庫) 등의 건축물이 갖춰졌지만 조선말기 군사적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돼 성곽과 시설물들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독용산성 안에는 절을 비롯해 여러 건물이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터는 안국사지(安國寺址)다. 기록에 따르면 안국사 외에도 보국사(保國寺), 진남사(鎭南寺)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안국사지를 제외한 다른 절터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