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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다솔사 극락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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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 주련의 글씨를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출처를 확인하지 못하였음. 정확한 사실이라면 언급해도 좋을 것으로 보임.
 
* 극락전 주련의 글씨를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출처를 확인하지 못하였음. 정확한 사실이라면 언급해도 좋을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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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은 죽은 이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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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 극락전은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과 소실을 거듭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지은 것을 2007년에 해체 수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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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내부에는 아미타불 좌상을 모셨고, 칠성과 산신 등을 그린 불화가 함께 걸려 있다. 건물 외벽에는 불교의 깨달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지붕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이 달려있다. 주련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썼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1년 5월 13일 (목) 03:25 판


다솔사극락전
다솔사 극락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다솔사극락전
한자 多率寺極樂殿
주소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 (용산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지정일 1985년 11월 14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불전
관리자 다솔사
시대 신라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다솔사 극락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本尊)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무량불(無量佛)이라고도 하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大願)을 품은 서방정토 세계의 부처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처음 건립된 이 극락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과 소실을 거쳐 1910년대 중건한 것이 지금에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 좌우 측의 창호와 머름, 벽체의 설치가 특이하다.

수정 국문

초고

극락전은 죽은 이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다솔사 극락전은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율사(590-658)가 사찰을 창건할 때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6년(1680)년부터 사찰을 중창하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영조 24년(1748)년의 화재와 1914년의 화재 등으로 각각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2007년에 해체 후 복원한 것이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상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다. 건물 외벽에는 불교의 깨달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지붕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이 달려있다.

  • 건물 앞면 좌우 칸의 창호와 벽체 그리고 난간 형태의 머름(바람을 막거나 모양을 내기 위하여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 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 등의 설치가 특이하다. -> 건물 정면의 양쪽 아래에 난간 형태로 설치한 나무 판재들이나, 창호의 모습이 특이하다. ; 어느 부분이 특이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므로 확인 후 특기할 만한 내용이라면 추가해야 함.
  • 임진왜란 이후의 중창 시기 확인 필요 - 1680년(문화재청)/1686년(다솔사 중건비 기준)/1696년(논문)
  • 응진전과 동쪽 요사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 극락전 주련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한다.

1차 수정

극락전은 죽은 이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다솔사 극락전은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과 소실을 거듭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지은 것을 2007년에 해체 수리한 것이다.

전각 내부에는 아미타불 좌상을 모셨고, 칠성과 산신 등을 그린 불화가 함께 걸려 있다. 건물 외벽에는 불교의 깨달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지붕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이 달려있다.

  • 극락전 주련의 글씨를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출처를 확인하지 못하였음. 정확한 사실이라면 언급해도 좋을 것으로 보임.

자문의견

2차 수정

극락전은 죽은 이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다솔사 극락전은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과 소실을 거듭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지은 것을 2007년에 해체 수리한 것이다.

전각 내부에는 아미타불 좌상을 모셨고, 칠성과 산신 등을 그린 불화가 함께 걸려 있다. 건물 외벽에는 불교의 깨달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지붕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이 달려있다. 주련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썼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다솔사_극락전 Object 다솔사_극락전
사천_다솔사_대양루 Object 사천_다솔사_대양루
다솔사_안심료 Object 다솔사_안심료
한용운 Actor 한용운(韓龍雲,_1879-1944)
자장율사 Actor 자장율사(慈藏律師,_590-658)
다솔사_적멸보궁 Object 다솔사_적멸보궁
다솔사_응진전 Object 다솔사_응진전
임진왜란 Event 임진왜란(1592)
아미타불 Concept 아미타불
다솔사 Place 다솔사
사천_다솔사_보안암_석굴 Place 사천_다솔사_보안암_석굴
L38-0148-0000 Heritage (경상남도_문화재자료_제148호)_다솔사_극락전
H38-0083-0000 Heritage (경상남도_유형문화재_제83호)_사천_다솔사_대양루
L38-0149-0000 Heritage (경상남도_문화재자료_제149호)_다솔사_응진전
H38-0039-0000 Heritage (경상남도_유형문화재_제39호)_사천 다솔사 보안암 석굴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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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 다솔사_안심료 has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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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_안심료 한용운 isRelatedTo
다솔사 자장율사 isRelatedTo
다솔사 임진왜란 isRelatedTo
다솔사_극락전 아미타불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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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_다솔사_대양루 H38-0083-0000 isDesignated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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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다솔사 극락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1480000 →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때 연기조사가 ‘영악사’라는 이름으로 세웠고, 후에 도선국사가 ‘다솔사’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극락전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숙종 6년(1680)에 새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으며, 건물 앞면 좌우 칸의 창호와 벽체 그리고 난간 형태의 머름 등의 설치가 특이하다.
  • 장일규, 「사천 다솔사의 역사와 사격(寺格)」, 『민족문화연구』 81, 2018, 377~405쪽. → 사천 다솔사에는 통일신라시대나 고려 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굴과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초반 이후에 작성된 다솔사 관련 문헌 자료도 전한다. 다솔사는 지영이 창건한 뒤 자장, 의상, 도선, 나옹에 의해서 네 차례 중창되었다고 전한다. 다만 ‘타솔사’, ‘영봉사’, ‘영악사’ 등으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 혜근 이후에 계속 香火를 이었지만, 1592년에 경내 건물의 반 이상이 불탄 뒤에는 1696년의 중건 불사로 옛 모습을 회복하였고, 1758년의 중건 불사로 10년 전 소실된 전각의 일부를 회복하였으며, 1777년과 1785년에는 팔상전 중수를 계기로 일부를 복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1758년에 절 이름을 ‘다솔사’로 변경하였다. 다. 그 뒤 20세기 초까지 일부의 또 다른 전각을 중건하는 불사가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1914년에 다시 다솔사 전역이 화재에 휩싸이면서 현재의 건물은 그 이후에 중건한 것이다.
  • 다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469 → 503년(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 사천 다솔사 극락전 해체 후 복원 공사, 경남도민일보, 2007.8.10.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125
  • 이야기가 있는 공간(14) 사천 다솔사, 경남신문, 2017.11.16.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32302 → 표지판엔 신라 지증왕 4년(503)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해 ‘영악사’라 불리다가 선덕여왕 5년(636)에 이르러 지금의 다솔사로 개칭했다고 적혀 있지만 당시엔 다솔사가 아니라 ‘타솔사’로 불렸다”며 오기를 바로잡았다. / 다솔사가 이름난 배경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 덕이 크다고 했다. 이곳은 다른 절의 대웅전 격이지만 불상이 없다. 부처의 몸인 진신사리가 있는 곳이어서다. 지난 1978년에 대웅전 삼존불상에 금칠을 하는 개금불사 중 후불탱화 속에서 사리가 발견되자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바꿨다.
  • 다솔사 극락전 - 사천 고성 통영[5], 문화재? 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2009.8.13. https://blog.naver.com/mallarmel/10067430174 → 안에는 1920년에 금성 성전이 그린 삼장탱,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현왕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 외벽에는 여덟 면에 걸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네 폭은 팔상도 등 불교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네 폭은 도교적 색채가 짙은 그림이다. 네 폭의 불교 관련 벽화는 중국의 혜가 스님이 달마대사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는 과정, 연등불에게 모래 공양을 올린 소년의 이야기,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꼐 각지로 유행할 때 백골에게 경배하던 이야기, 그리고 원효와 의상 스님이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밤에 해골물을 마신 이야기 등이다. 극락전 주련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