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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0270000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0270000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대표명칭=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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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Ritual House and Shrine of the Gwangsan Kim Clan
 
|한자=光山金氏齋舍및祠堂<齋舍3棟,祠堂>
 
|한자=光山金氏齋舍및祠堂<齋舍3棟,祠堂>
 
|주소=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번지
 
|주소=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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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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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이 건물은 광산김씨 김효로(金孝盧, 1454~1534)를 모시기 위하여 중종 31년(1536)에 손자 김부필(金富弼)이 후손들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제향하였으며 후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亥, 1555~1593)을 추향하였다. 김부필는 여러 차례 나라에서 참봉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
재사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묘(祠廟) 옆에 지은 집을 말한다.
  
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一’자형으로 안마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1972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후조당(後彫堂), 탁청정(濯淸亭)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광산 김씨 재사와 사당은 광산 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36년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후손들과 함께 세웠다. 김부필의 스승이었던 이황(1502~1570)이 김효로의 묘비명을 직접 써주었는데, 그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시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한 김해(金垓)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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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ㅡ’자형 건물 두 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뒤편 왼쪽에 있다.  
====초고====
 
이 건물은 광산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재사와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36년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후손들과 함께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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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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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rine and Ritual House of the Gwangsan Kim Clan'''
  
김효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으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학행이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이 지역의 관찰사였던 김안국(金安國)에게 천거되었다. 죽은 뒤에는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과 함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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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hrine established in 1536 honors Kim Hyo-ro (1454-1534), the first person from the Gwangsan Kim clan to move to Ocheon-ri Village. The ritual house in front of the shrine is where the goods used during memorial rituals are stored and prepared. It also is used to look after Kim Hyo-ro’s tomb, which is located nearby.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도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김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추천된 인재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남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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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the tombstone inscription written by the renowned scholar Yi Hwang (1501-1570), Kim Hyo-ro did not pursue a career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instead studied on his own with pure and proper conduct. He taught his descendants through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and friendship with his brothers.
  
이 집은 재사가 ‘ㅡ’자형 건물 2개가 앞뒤로 있고 그 사이에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가 있다. 사당은 별도로 하나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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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rine and ritual house were first built by Kim Hyo-ro’s grandson Kim Bu-pil (1516-1577) and other members of the clan. They were originally located near the Nakdonggang River, but were moved in 1975 to the current site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Andong Dam. The ritual house consists of two buildings placed in parallel with a courtyard in between. To the right of the courtyard is a building used as a storehouse. The shrine is located at the back of the property and is surrounded by its own stone wall.
  
본래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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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honored at the shrine is Kim Hyo-ro’s great-grandson, the civil official Kim Hae (1555-1593). Kim Ha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4 and served as a royal histographer. He lost his lif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3, where he served as the regional leader of the Korean civilian army.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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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광산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재사와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36년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후손들과 함께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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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광산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를 기리기 위해 1536년에 건립된 사당이다. 사당 앞의 건물은 김효로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사이다.
  
김부필의 스승이었던 이황(1502~1570)이 김효로의 묘비명을 직접 써주었는데, 그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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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1501~1570)이 김효로의 묘비명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도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김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추천된 인재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남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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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과 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ㅡ’자형 건물 2개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뒤편 왼쪽에 있다.  
  
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ㅡ’자형 건물 2개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뒤편 왼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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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로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도 사당에 함께 모시고 있다. 김해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추천된 인재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남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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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재사]]
 
[[분류:재사]]
 
[[분류:사당]]
 
[[분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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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국문집필]]

2020년 9월 29일 (화) 14:41 기준 최신판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Ritual House and Shrine of the Gwangsan Kim Clan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영문명칭 Ritual House and Shrine of the Gwangsan Kim Clan
한자 光山金氏齋舍및祠堂<齋舍3棟,祠堂>
주소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지정일 1973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5동
웹사이트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재사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묘(祠廟) 옆에 지은 집을 말한다.

광산 김씨 재사와 사당은 광산 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36년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후손들과 함께 세웠다. 김부필의 스승이었던 이황(1502~1570)이 김효로의 묘비명을 직접 써주었는데, 그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시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한 김해(金垓)를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ㅡ’자형 건물 두 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뒤편 왼쪽에 있다.

영문

Shrine and Ritual House of the Gwangsan Kim Clan

This shrine established in 1536 honors Kim Hyo-ro (1454-1534), the first person from the Gwangsan Kim clan to move to Ocheon-ri Village. The ritual house in front of the shrine is where the goods used during memorial rituals are stored and prepared. It also is used to look after Kim Hyo-ro’s tomb, which is located nearby.

According to the tombstone inscription written by the renowned scholar Yi Hwang (1501-1570), Kim Hyo-ro did not pursue a career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instead studied on his own with pure and proper conduct. He taught his descendants through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and friendship with his brothers.

The shrine and ritual house were first built by Kim Hyo-ro’s grandson Kim Bu-pil (1516-1577) and other members of the clan. They were originally located near the Nakdonggang River, but were moved in 1975 to the current site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Andong Dam. The ritual house consists of two buildings placed in parallel with a courtyard in between. To the right of the courtyard is a building used as a storehouse. The shrine is located at the back of the property and is surrounded by its own stone wall.

Also honored at the shrine is Kim Hyo-ro’s great-grandson, the civil official Kim Hae (1555-1593). Kim Ha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4 and served as a royal histographer. He lost his lif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3, where he served as the regional leader of the Korean civilian army.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광산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를 기리기 위해 1536년에 건립된 사당이다. 사당 앞의 건물은 김효로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사이다.

이황(1501~1570)이 쓴 김효로의 묘비명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당과 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ㅡ’자형 건물 2개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뒤편 왼쪽에 있다.

김효로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도 사당에 함께 모시고 있다. 김해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추천된 인재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남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