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양희 신도비
함양 양희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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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함양 양희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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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6호 |
지정(등록)일 | 2012년 3월 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 |
수량/면적 | 1 |
웹사이트 | 함양 양희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기존 국문
이 문화재는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 1515~1580)의 신도비이다. 구졸암은 노진(盧禛),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이른바 천령삼걸(天嶺三傑)의 일인으로,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본 신도비는 1858년에 세워진 것이나 석재 자체는 구졸암의 손자에 의해 이미 약 350여 년 전에 다듬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찬술하였고, 글씨는 호조참판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썼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는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양희(梁喜, 1515~1580)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58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1540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1546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1580년 중국 옥하관에서 병사하였다. 이후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양의 구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이 지역 출신인 노진(盧禛, 1518~1578), 이후백(李後白, 1520~1578)과 함께 “천령삼걸(天嶺三傑)”로 불렸는데, 천령은 함양의 옛 지명이다. 스스로 아홉 가지의 옹졸함을 지녔다는 뜻으로 “구졸암(九拙菴)”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항상 자신의 학문이 모자란다는 생각으로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찬술하였고, 글씨는 호조참판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썼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는 당시 중앙정계와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함양문화원, 『함양금석문총람』, 함양문화원, 2004.
→신도비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는 남원 양씨의 유래, 양희의 이력, 1580년 동지사로 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 함양 양희 신도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3805460000#
- 함양 양희 신도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