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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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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선생 묘
조익선생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조익선생 묘
한자 趙翼先生 墓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산33-1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4호
지정(등록)일 1987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97,887㎡
웹사이트 조익선생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조선 중기의 문신 조익(1579-1655)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신도비, 묘비와 사우와 함께 있다. 선생의 본관은 풍양, 호는 포저 시호는 문효이다. 1602년(선조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까지 올랐다. 성리학자로서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서화에 능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시낭현 도고산에 초가를 짓고 경사의 연구에 몰두한 것이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묘는 1655년(효종 6년) 햔재 위치의 근처에 설치했다가, 1690년(숙종 16년) 시호를 받으면서 예장한 것이다. 봉분 아래 부분은 둘레돌을 쌓았고, 앞으로 한층 아래에는 상석과 묘비가 서 있다. 서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건물이고, '보호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유물관에 문집 등의 전적이 보존되어 있다, 묘의 입구에는 1927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서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조익 선생 묘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유학자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묘역이다. 묘는 1655년(효종 6년) 현재 위치의 근처에 설치했다가, 1690년(숙종 16년) 시호를 받으면서 예장(禮葬)한 것이다.

조익 선생 묘는 원형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둘렀는데, 돌에는 을좌신향(乙坐辛向)을 뜻하는 ‘신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을좌신향(乙坐辛向) :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을방(乙方)을 등지고 신방(辛方)을 바라보는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 자리.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이다.

한 단 아래에는 상석과 묘비, 문인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면적은 97,887㎡으로, 조익의 묘 아래로 30m 떨어진 곳에 조익의 묘비가 있으며, 그 앞에 사우가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건물이고, ‘보호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유물관에 문집 등의 전적이 보존되어 있다.

조익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1602년(선조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1611년(광해군 3),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이듬해 사직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신창현 도고산(道高山)에 초가를 짓고 경사(經史)의 연구에 몰두한 것이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었고, 효종대 좌의정까지 올랐다. 조익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1차 수정

조익선생 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의 묘가 조익과 부인의 묘이고 아래의 묘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趙瑩中, 1558~1646)과 해평윤씨의 합장묘이다.

조익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 선조 35년(1602)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광해군(1608~1623 재위)이 계모인 인목대비(1584~1632)를 폐위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조익은 고향은 광주에 머물다가 신창(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주하여 초가를 짓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1623~1649 재위)가 즉위하자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며,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좌의정까지 올랐다.

묘는 원형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둘렀다.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나 집터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해 앉아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길지를 뜻하는 말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문인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조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고종 4년(1867)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년에 세운 조익 사당이 있다.

  • 조익 사당은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임. 조성연대 확인 필요.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조익선생 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합장묘이다. → 이 곳은 조익선생 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 선생과 부인 성주현씨의 묘이다.
    • 위의 묘가 조익과 부인의 묘이고 → 위의 묘가 조익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사태가 빚어지자 →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하자
    • 조익은 고향은 → 조익은 고향인
    • 학문연구에 → 학문 연구에
    •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며,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좌의정까지 올랐다. → 다시 관직에 진출하여 좌의정까지 올랐다.
    •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나 집터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해 앉아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길지를 뜻하는 말이다. → 돌에는 ‘신향(辛向)’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묘소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했다는 말이다.(풍수지리에서 하는 말이 정설도 아니고, 그런 뜻을 담은 것도 아님. 그저 좌향을 표시한 것이 뿐임.)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조익은 고향은 광주에 머물다가-> 조익은 고향인 광주(지금의 화성시 매송면)에 머물다가
    •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좌의정까지 올랐다-> 좌의정까지 올랐다. 사망 직후 충청도 대흥 현 동화산 일대에 묻혔다가 1672년 신창 도고산 일대로 이장하였고, 1690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 돌에는 ‘신향(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나 집터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해 앉아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길지를 뜻하는 말이다. ->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묏자리가 서북쪽을 향해 앉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1.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조익선생 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의 부부묘가 조익과 부인의 묘이고 아래에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趙瑩中, 1558~1646)과 해평윤씨의 합장묘가 있다.
    • 조익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예학에 밝고 서화에도 능하였다. 선조 35년(1602)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광해군(1608~1623 재위)이 계모인 인목대비(1584~1632)를 폐위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조익은 고향은 광주에 머물다가 신창(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주하여 초가를 짓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1623~1649 재위)가 즉위하자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며,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좌의정까지 올랐다.
    • 묘는 1655년(효종 6년) 현재 위치의 근처에 설치했다가, 1690년(숙종 16년)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예장(禮葬)한 것이다. 묘는 원형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둘렀다.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나 집터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해 앉아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길지를 뜻하는 말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문인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조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고종 4년(1867)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년에 세운 조익 사당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