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조식 유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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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 =='''해설문'''== | ||
− | === | + | ===국문=== |
− | 조선시대의 | + | 산청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사적지이다. |
− | + |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 조언형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기묘사화로 아버지가 파직되고 세상을 떠난 후 중종 26년(1531)에 처가인 김해지역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 |
− | + |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특히 명종 10년(1555)에 내려진 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 |
− | + | 이후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현재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72세에 생을 마감한 후 영의정 벼슬과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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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 |
− | + |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우측에는 덕천서원과 별도로 문중에서 조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뒷산에 조식 묘소가 있다. | |
− | + |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종 7년(1870)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새로 지었다. 서원 안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서원 남쪽 하천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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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영문=== | |
+ |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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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영문 해설 내용=== |
− | + |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조식(1501-1572)과 관련된 유적이다. | |
− |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 + |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 조언형(1469-1526)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1519년 사화로 아버지가 파직되고 세상을 떠난 후, 1531년 처가인 김해 지역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
− | + | 이황(1501-1570)과 함께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특히 1555년에 단성(지금의 산청 지역) 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 |
− | + | 이후 1561년 지리산 덕천동(지금의 산청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1615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
− | + |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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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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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리에는 산천재, 조식의 묘, 신도비 등이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구(1543-1620), 김우옹(1540-1603), 곽재우(1552-1617)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우측에는 문중에서 조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뒷산에 조식 묘소가 있다. | ||
+ |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덕천서원은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에 세운 서원이다. 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새로 지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와 강당인 경의당이 있다. 서원 남쪽 하천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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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2021 영문집필]] |
2021년 8월 27일 (금) 00:54 판
산청 조식 유적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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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산청 조식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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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
한자 | 山淸 曺植 遺蹟 |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384번지 일원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305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1월 26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71,915㎡ |
웹사이트 | 산청 조식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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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산청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사적지이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 조언형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기묘사화로 아버지가 파직되고 세상을 떠난 후 중종 26년(1531)에 처가인 김해지역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특히 명종 10년(1555)에 내려진 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이후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현재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72세에 생을 마감한 후 영의정 벼슬과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우측에는 덕천서원과 별도로 문중에서 조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뒷산에 조식 묘소가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종 7년(1870)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새로 지었다. 서원 안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서원 남쪽 하천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영문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조식(1501-1572)과 관련된 유적이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 조언형(1469-1526)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1519년 사화로 아버지가 파직되고 세상을 떠난 후, 1531년 처가인 김해 지역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황(1501-1570)과 함께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특히 1555년에 단성(지금의 산청 지역) 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이후 1561년 지리산 덕천동(지금의 산청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1615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산천재, 조식의 묘, 신도비 등이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구(1543-1620), 김우옹(1540-1603), 곽재우(1552-1617)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우측에는 문중에서 조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뒷산에 조식 묘소가 있다.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덕천서원은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에 세운 서원이다. 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새로 지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와 강당인 경의당이 있다. 서원 남쪽 하천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 산청 조식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803050000
- 산청 조식 유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338
- 산청 조식 유적,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1928&cid=40942&categoryId=33546
- 산청 조식 유적,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43821&cid=42840&categoryId=42851
- 조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336
- 덕천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434
- 덕천서원, 한국서원연합회. http://www.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901&sca=&sfl=wr_subject&stx=%EB%8D%95%EC%B2%9C&sop=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