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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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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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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 선생 묘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 현씨의 무덤이다. 묘역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위의 묘가 조익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아래의 묘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趙瑩中, 1558~1646)과 해평 윤씨의 합장묘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조익(1579-1655)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신도비, 묘비와 사우와 함께 있다. 선생의 본관은 풍양, 호는 포저 시호는 문효이다. 1602년(선조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까지 올랐다. 성리학자로서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서화에 능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시낭현 도고산에 초가를 짓고 경사의 연구에 몰두한 것이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묘는 1655년(효종 6년) 햔재 위치의 근처에 설치했다가, 1690년(숙종 16년) 시호를 받으면서 예장한 것이다. 봉분 아래 부분은 둘레돌을 쌓았고, 앞으로 한층 아래에는 상석과 묘비가 서 있다. 서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건물이고, '보호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유물관에 문집 등의 전적이 보존되어 있다, 묘의 입구에는 1927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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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은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과 서화에 뛰어났던 인물로 1602년(선조 35_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광해군(1608~1623 재위_이 의붓어머니인 인목대비(1584~1632_를 폐위*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가두어 놓자 벼슬에서 물러나 신창(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주하여 초가를 짓고 학문 연구에 몰두한 것이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이다.
 
===수정 국문===
 
====초고====
 
조익 선생 묘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유학자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묘역이다. 묘는 1655년(효종 6년) 현재 위치의 근처에 설치했다가, 1690년(숙종 16년) 시호를 받으면서 예장(禮葬)한 것이다.
 
조익 선생 묘는 원형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둘렀는데, 돌에는 을좌신향(乙坐辛向)을 뜻하는 ‘신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을좌신향(乙坐辛向) :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을방(乙方)을 등지고 신방(辛方)을 바라보는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 자리.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이다.
 
한 단 아래에는 상석과 묘비, 문인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면적은 97,887㎡으로, 조익의 묘 아래로 30m 떨어진 곳에 조익의 묘비가 있으며, 그 앞에 사우가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건물이고, ‘보호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유물관에 문집 등의 전적이 보존되어 있다.
 
조익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1602년(선조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1611년(광해군 3),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이듬해 사직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신창현 도고산(道高山)초가를 짓고 경사(經史)의 연구에 몰두한 것이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었고, 효종대 좌의정까지 올랐다. 조익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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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1623~1649 재위_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좌의정까지 올랐다. 사망한 후에 충청도 동화산 일대에 모셨다가 현종 때(1660)에는 신창 도고산 일대로 묘를 옮겼고, 1690년(숙종 16)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묘의 아랫부분을 둘러싼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묘소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했다는 뜻이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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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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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위: 왕비 등의 자리를 폐함.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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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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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Jo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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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tomb of the civil official and scholar Jo Ik (1579-1655) and his wife Lady Hyeon of the Seongju Hyeon Clan. In front of the tomb is the tomb of Jo Ik’s parents, Jo Yeong-jung (1558-1646) and Lady Yun of the Haepyeong Yun C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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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Ik, an expert in neo-Confucianism, was well versed in the study of rites and calligraphy.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02 and held various official posts. In 1618, when King Gwanghaegun (r. 1608-1623) took away the royal title of his stepmother Queen Dowager Inmok (1584-1632) and confined her in the West Palace (today’s Deoksugung Palace), Jo Ik decided to leave his official post and move to Sinchang (today’s Asan area), where he built a thatched-roof house and devoted himself to his studies. In 1623, when King Injo (r. 1623-1649) took the throne, Jo Ik returned to office, eventually becoming second state councilor. Upon his death, Jo Ik was first buried near Donghwasan Mountain in Yesan, but his tomb was later moved to Dogosan Mountain in Sinchang in 1660 and then to its current location in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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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se of the circular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tone plates. These stones are inscribed with the characters ''sinhyang'' (辛向), which indicates that the tomb faces northwest.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there are several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a tombstone, two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nd two pil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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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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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조익(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합장묘이다. 묘 앞에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1558-1646)과 해평윤씨의 합장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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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과 서화에 뛰어났다. 1602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18년 광해군(재위 1608-1623)이 계모인 인목대비(1584-1632)를 폐위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가두자, 조익은 벼슬에서 물러나 신창(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초가를 짓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재위 1623-1649)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사망 직후 예산 동화산 일대에 묻혔다가 1660년 신창 도고산 일대로 이장하였고, 1690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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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봉분 아랫부분에는 둘레돌을 둘렀다.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묘소가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문인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 네이버 국어사전 ’을좌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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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익 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402840000
https://ko.dict.naver.com/#/entry/koko/004a5f9c51404fa6bd793b3733d24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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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익 선생 묘, 디지털예산문화대전. http://yesan.grandculture.net/yesan/toc/GC06600547
* 두산백과 ’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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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익 선생 묘,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7745&cid=40942&categoryId=37404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0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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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 여행[충남 예산] 조익선생 묘, 왕릉 문화사랑 오솔길,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cjjtmdh/56k2/458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익 선생 묘’
+
* 조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512
http://rinks.aks.ac.kr/RINKSRedirect.aspx?sCode=GC&sId=GC0280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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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익,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2030&cid=40942&categoryId=33383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익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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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좌신향,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entry/koko/004a5f9c51404fa6bd793b3733d24064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840000,34&pageNo=1_1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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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백과 ’조익 선생 묘’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7545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예산군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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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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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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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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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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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11월 21일 (일) 20:40 기준 최신판

조익선생 묘
Tomb of Jo Ik
조익선생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조익선생 묘
영문명칭 Tomb of Jo Ik
한자 趙翼先生 墓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산33-1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4호
지정(등록)일 1987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97,887㎡
웹사이트 조익선생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익 선생 묘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부인 성주 현씨의 무덤이다. 묘역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위의 묘가 조익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아래의 묘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趙瑩中, 1558~1646)과 해평 윤씨의 합장묘이다.

조익은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과 서화에 뛰어났던 인물로 1602년(선조 35_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광해군(1608~1623 재위_이 의붓어머니인 인목대비(1584~1632_를 폐위*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가두어 놓자 벼슬에서 물러나 신창(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주하여 초가를 짓고 학문 연구에 몰두한 것이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이다.

1623년 인조(1623~1649 재위_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좌의정까지 올랐다. 사망한 후에 충청도 동화산 일대에 모셨다가 현종 때(1660)에는 신창 도고산 일대로 묘를 옮겼고, 1690년(숙종 16)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묘의 아랫부분을 둘러싼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묘소가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했다는 뜻이다.


  • 폐위: 왕비 등의 자리를 폐함.

영문

Tomb of Jo Ik

This is the tomb of the civil official and scholar Jo Ik (1579-1655) and his wife Lady Hyeon of the Seongju Hyeon Clan. In front of the tomb is the tomb of Jo Ik’s parents, Jo Yeong-jung (1558-1646) and Lady Yun of the Haepyeong Yun Clan.

Jo Ik, an expert in neo-Confucianism, was well versed in the study of rites and calligraphy.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02 and held various official posts. In 1618, when King Gwanghaegun (r. 1608-1623) took away the royal title of his stepmother Queen Dowager Inmok (1584-1632) and confined her in the West Palace (today’s Deoksugung Palace), Jo Ik decided to leave his official post and move to Sinchang (today’s Asan area), where he built a thatched-roof house and devoted himself to his studies. In 1623, when King Injo (r. 1623-1649) took the throne, Jo Ik returned to office, eventually becoming second state councilor. Upon his death, Jo Ik was first buried near Donghwasan Mountain in Yesan, but his tomb was later moved to Dogosan Mountain in Sinchang in 1660 and then to its current location in 1690.

The base of the circular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tone plates. These stones are inscribed with the characters sinhyang (辛向), which indicates that the tomb faces northwest.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there are several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a tombstone, two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nd two pillar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조익(1579-1655)과 부인 성주현씨의 합장묘이다. 묘 앞에는 조익의 부모인 조영중(1558-1646)과 해평윤씨의 합장묘가 있다.

조익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과 서화에 뛰어났다. 1602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18년 광해군(재위 1608-1623)이 계모인 인목대비(1584-1632)를 폐위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가두자, 조익은 벼슬에서 물러나 신창(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초가를 짓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재위 1623-1649)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사망 직후 예산 동화산 일대에 묻혔다가 1660년 신창 도고산 일대로 이장하였고, 1690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둥근 봉분 아랫부분에는 둘레돌을 둘렀다. 돌에는 ‘신향(辛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묘소가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문인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