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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가마는 고려시대에 숯을 만들던 곳으로, 원래 충주 본리 유적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 + | 이 가마는 고려시대에 숯을 만들던 곳으로, 원래 충주 본리 유적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 | 나무가 탄화되는 공간인 소성실과 연기가 배출되는 | + | 이 가마는 나무가 탄화되는 공간인 소성실과 연기가 배출되는 연도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성실에 목재를 넣고 점화하는 공간인 전면 작업장 일부도 확인되었다. 소성실의 규모는 길이 640㎝, 너비 88㎝, 남아 있는 깊이는 30㎝이다. 연도부는 소성실과 약 42㎝가량 떨어져서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뚫었는데, 직각으로 꺾여 소성실의 바닥면과 연결되어 있다. 연도부의 규모는 너비 15㎝, 남아 있는 깊이는 38㎝이다. |
− |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소성실 한쪽 면에 출입구가 있는 | + | 일반적으로 백탄요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소성실 한쪽 면에 출입구가 있는 반면, 흑탄요는 측면 출입구가 사라지고 소성실이 사각형과 원형으로 지어진다. 이 가마는 백탄요에서 흑탄요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조성된 것으로,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
2024년 8월 16일 (금) 13:41 판
본리 당저 유적 1호 목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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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본리 당저 유적 1호 목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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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本里 堂底 遺蹟 1號 木炭窯 |
해설문
국문
본리 당저 유적 1호 목탄요는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에서 옮겨와 복원하였다. 이 유적에는 나무가 탄화되는 공간인 소성실(燒成室)과 연기가 배출되는 연도부(煙道部)가 남아 있다. 또 소성실에 목재를 넣고, 점화하는 공간인 전면 작업장 일부도 확인되었다.
소성실의 규모는 길이 640㎝, 너비 88㎝, 남아 있는 깊이는 30㎝이다. 연도부는 소성실과 약 42㎝가량 떨어져서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뚫었는데, 직각으로 꺾여 소성실의 바닥면과 연결되어 있다. 연도부의 규모는 너비 15㎝, 남아 있는 깊이는 38㎝이다. 과학적 분석(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본리 당저 유적 1호 목탄요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소성실 한쪽 면에 출입구(側口)가 있는 백탄요(白炭窯)에서, 측면 출입구가 사라지고 소성실이 사각형과 원형인 흑탄요(黑炭窯)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조성된 것으로,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가마는 고려시대에 숯을 만들던 곳으로, 원래 충주 본리 유적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마는 나무가 탄화되는 공간인 소성실과 연기가 배출되는 연도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성실에 목재를 넣고 점화하는 공간인 전면 작업장 일부도 확인되었다. 소성실의 규모는 길이 640㎝, 너비 88㎝, 남아 있는 깊이는 30㎝이다. 연도부는 소성실과 약 42㎝가량 떨어져서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뚫었는데, 직각으로 꺾여 소성실의 바닥면과 연결되어 있다. 연도부의 규모는 너비 15㎝, 남아 있는 깊이는 38㎝이다.
일반적으로 백탄요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소성실 한쪽 면에 출입구가 있는 반면, 흑탄요는 측면 출입구가 사라지고 소성실이 사각형과 원형으로 지어진다. 이 가마는 백탄요에서 흑탄요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조성된 것으로,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