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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방화는 단순한 폭력 행위가 아니라, 광주항쟁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미국의 묵인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부산_미문화원_방화_사건]]에도 영향을 주며 전국적인 반미 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 + | 방화는 단순한 폭력 행위가 아니라, 광주항쟁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미국의 묵인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부산_미문화원_방화_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도 영향을 주며 전국적인 반미 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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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3일 (화) 22:15 판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방관한 미국에 대한 분노
이야기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무력 진압을 방관한 미국의 책임에 대한 분노는 광주 시민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과 저항의식을 낳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주 미문화원을 대상으로 한 항의 행위가 발생하였다. 1980년대 중반,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 소속이었던 정순철과 임종수 등은 미국의 책임을 규탄하며 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켰다.
방화는 단순한 폭력 행위가 아니라, 광주항쟁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미국의 묵인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도 영향을 주며 전국적인 반미 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