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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나타난 국내 1호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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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 이야기 ==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안중근(安重根)]] 의사를 기리는 조형물은 전국에 다수 존재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추모비는 바로 광주에 세워진 [[안중근_의사_숭모비|안중근 의사 숭모비]]였다. 이 비석은 원래 [[광주공원|광주공원]]에 설치되었으나, 이후 [[중외공원|중외공원(中外公園)]]으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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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 광주에서는 [[안중근|안중근(安重根)]]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_의사_숭모비|숭모비]][[광주공원|광주공원]]에 세워졌다. 이 비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안중근 추모비로, 비문은 유림계 독립운동가였던 [[김창숙|김창숙(金昌淑)]]이 짓고, 서예가 [[손재형|손재형]]이 글씨를 맡았다.
  
이 추모비는 단순한 기념 조형물을 넘어, 건립 배경과 구성 인물의 면면을 통해 당대 항일 정신과 문화적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비문은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였던 [[김창숙|김창숙(金昌淑)]]이 지었으며, 서체는 서예가 [[손재형|손재형]]이 집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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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같은 장소에 [[안중근_의사_동상|안중근 의사 동상]]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기존 숭모비의 기단과 좌대가 동상 설치에 재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숭모비는 자리를 잃고 방치되다가 결국 소재가 확인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25년 넘게 사라졌던 이 비석은 2019년, 나주의 한 농가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비석과 함께 조성된 [[안중근_의사_동상|안중근 의사 동상]]은 동일 인물을 기리되, 비보다 훨씬 뒤늦게 제작되어 [[중외공원]]에 함께 위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광주는 대한민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을 품은 도시가 되었으며, 25년이라는 세월 속에 잊혔다 다시 조명된 이 추모비는 그 상징성과 문화사적 가치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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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비석은 복원을 거쳐 그해 10월 25일, 동상이 위치한 [[중외공원|중외공원(中外公園)]]으로 이전되어 재건립되었다. 현재 [[안중근_의사_숭모비|숭모비]][[안중근_의사_동상|동상]] 곁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비문의 내용과 함께 의사를 기리는 기록적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7월 13일 (일) 16:32 기준 최신판

25년만에 나타난 국내 1호 추모비

이야기

1961년 12월, 광주에서는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기리는 숭모비광주공원에 세워졌다. 이 비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안중근 추모비로, 비문은 유림계 독립운동가였던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서예가 손재형이 글씨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같은 장소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기존 숭모비의 기단과 좌대가 동상 설치에 재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숭모비는 자리를 잃고 방치되다가 결국 소재가 확인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25년 넘게 사라졌던 이 비석은 2019년, 나주의 한 농가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견된 비석은 복원을 거쳐 그해 10월 25일, 동상이 위치한 중외공원(中外公園)으로 이전되어 재건립되었다. 현재 숭모비동상 곁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비문의 내용과 함께 의사를 기리는 기록적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스토리 그래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