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성당
기본 정보
| 이름 | 외성당 |
|---|---|
| 한자명 | 畏省堂 |
| 위도(latitude) | 35.2144665 |
| 경도(longitude) | 126.8040108 |
| 종류 | 주택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495 |
정의 및 개요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고택으로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건립 배경
- 조선 후기의 문인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1678)가 세우고 거처하였던 곳이다. 박광후의 사후에는 아들 박중회(朴重繪)가 거처하였다.
- 박광후의 문집인 『안촌집(安村集)』에 외성당에 대한 시문이 실려 있으며, 최익현과 기우만이 지은 「외성당기畏省堂記」가 있다.
건축문화적 특징 및 가치
- 1930년대에 철거된 후 새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관련 인물
- 박광후의 본관은 순천,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 또는 외성당(畏省堂)이다. 1637년(인조 15) 3월 3일 전라도 광주 아산리(鵝山里,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에서 태어났다.
- 1666년(현종 7)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송시열이 "은산(銀山)과 철벽이 될 사람"이라고 박광후를 칭찬하였다. 1678년 11월 15일에 42세로 전라도 광주 안청리(安淸里)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1861년에 기정진이 박광후의 유고를 정리한 『안촌집(安村集)』이 있다. 지금은 철폐된 광주의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다.
그 외 정보
- 최익현은 박광후의 후손인 박만동(朴萬東)을 우연히 만나 박만동의 요청으로 당기(堂記)를 지었는데, ‘두려워하며 살피라’라는 뜻의 당 이름을 빗대어 당시 서양 문물 도입으로 인하여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외성당 | https://gwangju.grandculture.net/gwangju/toc/GC60005426 |
| 웹리소스 | 광주서구문화원 | 외성당 | http://gjsgcc.or.kr/ko/26/view?SEQ=2570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외성당 | 박광후 | 외성당은 박광후가 짓고 거처했다. | ||
| 외성당 | 박중회 | 외성당은 박중회가 거처했다. | ||
| 안촌집 | 외성당 | 안촌집에 외성당에 대한 시문이 있다. | ||
| 안촌집 | 박광후 | 안촌집은 박광후의 문집이다. | ||
| 외성당 | 외성당기畏省堂記 | 외성당과 외성당기는 관련 있다. | ||
| 외성당기畏省堂記 | 최익현 | 외성당기는 최익현이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