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용
기본 정보
| 이름 | 양만용 |
|---|---|
| 한자명 | 梁曼容 |
| 이칭 | 장경(長卿)(자), 오재(梧齋)(호) |
| 위도(latitude) | 35.1650242 |
| 경도(longitude) | 126.7528769 |
| 생몰년도 | 1598~1651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 출생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여룡동 박뫼마을 |
정의 및 개요
- 양만용은 조선 후기 때 집의, 사간, 응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특징
-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장경(長卿), 호는 오재(梧齋)다.
- 증조부는 공조참판 양응정(梁應鼎), 조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고, 부친은 양산축(梁山軸)이다.
- 부친 양산축은 임진왜란 때 형들이 의병으로 전장에 나가자 집안일을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가족들과 피난길에 올랐으나 무안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어머니를 업은 채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부인 장흥고씨도 남편을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구조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고씨부인의 뱃속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양만용이다.
- 1633년(인조 11년)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같은 해, 증광문과에 합격했다. 이후 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 예조 좌랑 등의 관직을 지냈다.
-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 예문관 검열로 일할 때 권세가 김자점에게(金自點)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 승진에 제약을 받았다. 그럼에도 군수, 현감 같은 지방 관리와 수찬, 집의, 사간, 응교 등 관직을 두루 맡으며 정치 제도 개선에 공을 세웠다.
- 효종이 즉위한 뒤 청풍군수를 역임하다 1651년 병으로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공로로 영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양화남, 양세남이다.
- 저서로는 『오재집(梧齋集)』2책이 전해진다.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양만용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505 |
| 웹리소스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 양만용 |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78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양응정 | 양만용 | 양응정은 양만용의 증조부다 | ||
| 양팽손 | 양만용 | 양팽손은 양만용의 조부다 | ||
| 양산축 | 양만용 | 양산축은 양만용의 부친이다. | ||
| 양만용 | 양화남 | 양만용은 양화남의 부친이다 | ||
| 양만용 | 양세남 | 양만용은 양세남의 부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