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실
기본 정보
| 이름 | 김복실 |
|---|---|
| 한자명 | 金卜實 |
| 영문명 | Kim Boksil |
| 이칭 | 배재박치기 |
| 위도(latitude) | 35.1561693 |
| 경도(longitude) | 126.9096149 |
| 생몰년도 | 1905~1952 |
| 성별 | 남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생지 |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
정의 및 개요
- 김복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체육인이자 청년운동가다.
주요 활동/업적/저서/작품 등
- 1905년 전라남도 광주군 누항촌에서 출생했다.
-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했다. 이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 1922년 경성중학교 학생이 배재중학교 학생을 폭행한 사건을 계기로 정동예배당 앞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김복실은 이 싸움으로 '배재박치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학교를 자퇴하고 중국 펑텐대학 야구선수로 스카우트되어 2년간 선수 생활을 했다.
- 1924년 광주로 돌아왔으며, 광주 최초로 창설된 축구클럽 갑자단의 선수로 활약했다.
- 1930년대 결성된 광주축구단의 초대 단장을 맡았으며, 선수, 코치, 감독, 심판 등 1인 4역을 했다.
- 1945년 8월 광주청년대의 결성에 참여했으며,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 북부 중대장을 맡았다.
- 1945년 11월 광주청년단의 결성에 참여했으며, 부단장을 역임했다.
- 1956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역/단체 내 역할 또는 영향력
- 김복실은 해방 이후 초대 전남 축구협회장을 맡았다. 1956년 김복실이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는 전남 최초의 체육인장으로 치러졌다.
- 김복실은 해방 이후 광주청년대와 광주청년단에서 활동했으며, 두 단체에서 모두 요직을 맡았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간행물 | 논문 | 임선화, 「해방 이후 전남지방의 우익단체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 https://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cab9ddc4271f92b1ffe0bdc3ef48d419&keyword=%ED%95%B4%EB%B0%A9%20%EC%9D%B4%ED%9B%84%20%EC%A0%84%EB%82%A8%EC%A7%80%EB%B0%A9%EC%9D%98%20%EC%9A%B0%EC%9D%B5%EB%8B%A8%EC%B2%B4%20%EC%97%B0%EA%B5%AC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김복실 | https://gwangju.grandculture.net/gwangju/search/GC60002079 |
| 웹리소스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 김복실 |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934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김복실 | 광주공립보통학교 | 김복실은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 ||
| 김복실 | 광주청년대 | 김복실은 광주청년대에서 활동했다. | ||
| 김복실 | 광주청년단 | 김복실은 광주청년단에서 활동했다. | ||
| 김복실 | 갑자단 | 김복실은 갑자단의 선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