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추
기본 정보
| 이름 | 김극추 |
|---|---|
| 한자명 | 金克秋 |
| 이칭 | 여직(汝直), 절봉(節峰) |
| 생몰년도 | 1552년~1610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정의 및 개요
주요 활동
- 임진왜란 호남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 『광주읍지』에 김극추는 “김해인이다. 임진년(1592년)에 금산으로 나아가 공을 세우고, 계사년(1593년)에 권율을 도와 많은 기획을 하니 장졸들이 힘입어 살았다. 도사(都事)를 증하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하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 『호남절의록』에는 “자는 여직(汝直), 본관은 김해, 진사 숙곤(叔鵾)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에 동생인 김응추(金應秋)와 금산 싸움에 나아가 힘을 다해 적과 싸웠다. 적을 많이 죽인 공으로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다. 선문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충의사록』에는 “임진왜란 직후 권율이 광주목사로 부임하고 의병을 모을 때 그의 막하가 되어 이치 전투에서 고을 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이어 행주 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김극추는 병조좌랑(兵曹佐郞), 군기첨정(軍器僉正)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 판관(鏡城 判官), 해미 현감을 거쳤다. 영천 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니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 임진왜란 당시 입은 종독(腫毒)이 퍼져 1610년 1월 9일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 사후에 좌승지를 증직(贈職) 받았고, 우산동에 정려를 세웠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이설되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광주역사문화자원 스토리텔링 스토리 100 | 김극추 |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38 |
| 간행물 | 단행본 | 서구문화원, 『서구 마을이야기』, 2014 | |
| 간행물 | 단행본 | 김동수 역주,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 https://www.google.com/search?q=9788949907024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광주읍지』[1899] | http://aks.ai/GC60000877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김극추 | 임진왜란 호남 의병 | 김극추는 임진왜란 호남 의병으로 활동했다. | ||
| 김극추 | 권율 | 김극추는 권율 휘하에서 활동했다. | ||
| 김극추 | 광주읍지 | 김극추는 광주읍지에서 언급되었다. | ||
| 김극추 | 호남절의록 | 김극추는 호남절의록에서 언급되었다. | ||
| 김극추 | 서창동 | 김극추는 서창동에서 태어났다. | ||
| 김극추 | 우산동 | 김극추의 정려비는 우산동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