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청년단
기본 정보
| 이름 | 광주청년단 |
|---|---|
| 한자명 | 光州靑年團 |
| 유형 | 청년단체 |
| 설립자 | 이우근, 정성태, 김복실 등 30여 명 |
| 출범/해체시기 | 1945년 / 1949년 |
정의 및 개요
- 광주청년단은 해방 직후 광주 지역에서 청년 계몽과 건국 준비를 목적으로 활동했던 청년단체다.
출범 배경(계기)
- 1945년 8월 18일 광주 지역 최초의 청년단체인 광주청년대가 질서 유지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광주청년대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 역할을 겸임하는 큰 조직이었다.
- 1945년 9월, 광주에 진주한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의 무장 조직인 광주청년대에 도지사 등의 암살음모와 관련된 누명을 씌워 광주청년대를 해산시켰다.
- 1945년 11월 6일, 광주 지역 청년들은 광주청년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광주도서관 지하에서 광주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단장은 이우근, 부단장은 정성태와 김복실, 주봉식이 맡았다.
활동 및 사건
- 광주청년단은 청년 계몽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 준비 활동을 수행하였다.
- 광주청년단은 설립 당시에는 뚜렷한 정치색이 없었으며, 좌·우익이 모두 활동하는 청년단체였다.
- 1946년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광주청년단은 좌파 단체 연합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참여를 두고 의견대립이 발생했다. 그 결과 광주청년단의 5중단 가운데 3중단이 탈퇴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 이후 광주청년단은 우익 단체로서 활동했으며, 광주의 우익 청년단체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 1946년 광주청년단 주최로 반탁 시민궐기대회가 광주에서 열렸다.
지역문화적 영향력
- 광주청년단은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형성된 청년 단체 중 하나로, 광주에서 각종 사회 정치 참여와 건국 준비 활동, 청년 계몽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관련 인물/문헌/장소 등
- 광주청년단의 단장을 맡았던 이우근은 일제강점기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 광주청년단의 부단장을 맡았던 정성태는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일제강점기에 국민회의 전남도지부 청년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 광주청년단의 부단장을 맡았던 김복실은 지역에서 체육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광주청년단의 전신인 광주청년대에서도 활동했다.
해체 사유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간행물 | 논문 | 임선화, 「해방 이후 전남지방의 우익단체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80232413 |
| 웹리소스 | 전남대학교5·18연구소 |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와 미국, 45년 9월과 80년 | https://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library&wr_id=6435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광주청년단 | 광주청년대 | 광주청년단은 광주청년대를 계승했다. | ||
| 광주청년단 | 광주도서관 | 광주청년단은 광주도서관에서 결성됐다. | ||
| 이우근 | 광주청년단 | 이우근은 광주청년단의 단장이었다. | ||
| 주봉식 | 광주청년단 | 주봉식은 광주청년단의 부단장이었다. | ||
| 정성태 | 광주청년단 | 정성태는 광주청년단의 부단장이었다. | ||
| 김복실 | 광주청년단 | 김복실은 광주청년단의 부단장이었다. | ||
| 광주청년단 | 대한청년단 | 광주청년단은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