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1938)
개요
후난, 장시, 안후이, 뤄양 등 중국 남부지방에서 활동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다. 1919년 의열단으로도 활동하였던 김원봉이 1938년 10월 10일,'민족제일'과 '독립제일'이라는 구호 아래 창설하였고, 김원봉은 이후 대원들을 이끄는 총대장 직을 맡았다. 청산리전투(1920) 이후로 명맥이 끊겼던 항일 무장 투쟁의 불씨를 이어받은 단체이며, 중국 중앙정부인 국민 정부가 최초로 인정한 한국인 정규 부대이다. 총대와 2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100여 명으로 시작하였지만 설립 1년 만에 그 수가 3배에 달하는 약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이후 조선 의용대는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군 심문과 첩보, 암살 등의 비밀 작전에도 투입되었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었고, 관내지역에 존재하던 일부 조선의용대 병력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다.
창설 배경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전 세계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많은 기업이 파산했고 노동자들은 실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과 일본은 대외침략, 즉 전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식민지를 넓히는 길이 시장을 넓히는 길이라 생각하여 전쟁을 통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 역량을 하나로 모으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시작됐다. 의열단이 가장 먼저 움직인 결과 민족 혁명당이 탄생했고 산하 부대로 현상금이 가장 높았던 독립운동가(약 320억)로 유명한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 의용대가 1938년 10월 10일 창설되었다.
활동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는 1941년 12월 12일 새벽,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습한 일본군애 맞서 싸웠다. 이 전투를 호가장 전투라고 부른다. 12일 새벽, 대원들은 총성을 듣고 일본군의 기습을 알아차렸다. 이때 일본군의 병력은 약 300명이었음에 반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의 병력은 약 2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군의 맹렬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포위선을 돌파해 대부분의 대원이 탈출하였다. 손일봉, 최철호, 왕현순, 박철동 등 4명이 이때 전사하였고, 또 다른 4명의 대원이 중상이나 경상을 입었다. 의도치 않은 전투였고 짧은 교전이었으므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부대였으므로 중국 내에서는 꽤 이름을 알린 전투이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인들의 전쟁 참여 독려를 위한 선전전을 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이 모두 피난길에 올랐을 때에도 조선 의용대는 중국인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선전전을 계속하였다. 이를 본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궈뭐뤄는 그의 저서에서 조선 의용대에 대해 '내가 자동차로 거리를 돌아볼 때 그들은 표어를 쓰는데 열중해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나를 감동시킨 일막이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의용대의 벗들이었다. 무한이 함락의 운명에 직면한 이 위급한 시각에 우리를 대신해 대적군 표어를 쓰고 있는 것은 오직 조선의 벗들 뿐이었다.'며 언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