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성(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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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1891년)
대한민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독특한 수행 양식과 파격적 언어 사용으로 널리 알려진 승려로, 법명은 춘성, 법호는 춘성이며 속성은 이씨이다. 특히 만해 한용운의 상좌로 출가하여 평생 그의 사상적 영향을 깊이 받은 인물로 평가된다.
본항은 춘성의 출생, 수행, 사상, 문화적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개요
| 항목 | 내용 |
|---|---|
| 법명 | 춘성 |
| 본명 | 이창림 |
| 출생 |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 |
| 입적 | 1977년 8월 22일, 경기도 의정부시 망월사 |
|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
| 은사 | 한용운 |
| 구족계 | 1911년 금강산 유점사 동선 스님 계사 |
| 주요 활동 | 신흥사, 석왕사, 망월사 주지, 간화선 수행, 유심 잡지 필진 |
| 특징 | 무소유 실천, 화엄법사, 파격적 언어, 대중적 선풍 조성 |
춘성은 한용운, 백용성, 만공 등 근대 한국 불교의 핵심 인물들과 교유하며 독립운동 시기와 해방 이후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남겼다.
생애
출생과 어린 시절
춘성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9세 무렵 설악산 신흥사에서 불상을 본 뒤 출가를 결심하였다.
부모의 반대가 있었으나 여러 해를 설득한 끝에 1903년, 13세의 나이로 인제 백담사에서 한용운을 찾아가 사문이 되기를 청하였다.
한용운은 처음에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망설였으나, 며칠간 비를 맞아가며 정좌한 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의 사승 관계 형성은 후일 춘성의 사상과 실천 전반에 깊은 뿌리를 내린다.
출가와 초기 수행
1903년 백담사에서 삭발·사미계를 받고 춘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정식 비구가 되었으며, 1915년 안변군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여 경학에 능통한 강백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화엄경 연구에 깊이 몰두하여 후일 ‘화엄법사’로 불리게 된다.
한용운과의 사승 관계
춘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은사인 만해 한용운이다.
- 1903년 백담사에서 제자로 입문
- 한용운의 집필 활동 시 시봉 역할 담당
- 한용운이 3.1 운동으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전담
- 옥중의 한용운 서신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전승 존재
- 1918년 유심 창간 시 필진으로 참여
- 선·교 겸비한 수행 방식과 무소유의 실천은 한용운의 사상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짐
춘성의 독립운동 지원과 비타협적 태도는 사실상 한용운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선 수행의 심화
1920년 신흥사 주지로 부임하여 사찰 운영을 맡았으며, 이후 수덕사 정혜선원으로 내려가 만공 선사 문하에서 강도 높은 간화선 수행을 전개하였다.
덧붙여, 금강산 유점사에서 겨울마다 장좌불와와 냉수 수행을 반복하며 “졸음을 항복시켰다”라는 말로 정진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대중 포교와 주지 생활
1930년대 이후 석왕사, 신흥사, 망월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로 활동하였다. 무소유의 생활로 유명하며, 방문을 잠그지 않고 모든 것을 공개한 채 살았다.
망월사에서는 혹독한 수행 규율을 통해 많은 수좌를 배출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 전쟁 와중에도 홀로 사찰을 지키며 선풍을 이어갔다.
최후
1977년 8월 22일 망월사에서 입적하였다. 생전 유언에 따라 사리는 찾지 말고 비석이나 부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으며, 다비 후 재는 황해에 뿌려졌다.
수행과 사상
무소유의 실천
춘성의 대표적 특징은 평생에 걸친 무소유였다.
- 양복을 받으면 곧 노숙자에게 벗어 줌
- 돈을 모으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줌
- 방문이나 서랍을 잠그지 않음
- 이불을 덮지 않고 생활
- 수행자에게 사치품을 허용하지 않음
이는 한용운의 생애 후반 ‘무아·무소유’의 사상과도 긴밀하게 대응한다.
화엄경 이해와 교학 연구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정도로 경학에 통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로 불렸다. 이는 백용성·한용운·만공 등의 교학·선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로 평가된다.
파격적 언어 사용
일상적 언어에서 직설적 표현과 속어를 자주 사용했으나, 이는 상대의 집착을 깨뜨리고 선적 직관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되었다.
평생 수행 태도
- 장좌불와 고집
- 찬물 수행
- 항아리 속 수행
- 새벽 도량석을 평생 지속
- 늙어서도 수좌들과 동일한 강도의 수행 유지
이러한 엄격한 수행 방식은 그의 사상적 근간이 평생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요 사건 타임라인
| 연도 | 사건 | 설명 |
|---|---|---|
| 1891 | 출생 |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 |
| 1903 | 출가 | 백담사에서 한용운에게 사사, 사문 생활 시작 |
| 1911 | 구족계 | 금강산 유점사에서 구족계 수지 |
| 1915 | 전문강원 수료 | 석왕사 대교과 과정 수료 |
| 1918 | 유심 참여 | 한용운 창간 잡지 유심의 필진으로 활동 |
| 1919 | 독립운동 지원 | 옥중 한용운의 서신 전달 전승 존재 |
| 1920 | 신흥사 주지 | 사찰 운영과 선풍 강화 |
| 1930s | 정혜선원 수행 | 만공 문하에서 간화선 수행 정진 |
| 1946 | 망월사 주지 | 해방 후 망월사 선풍 재건 |
| 1950 | 한국전쟁 | 사찰을 떠나지 않고 망월사 수호 |
| 1977 | 입적 | 망월사에서 열반 |
문화적 영향
- 걸승 이미지와 해학적 풍자가 현대 불교 문화에서 상징적으로 회자됨
- EBS 강의에서 김용옥이 소개하면서 대중적 관심이 재점화됨
- 무소유 수행 방식은 법정 등 후대 승려에게도 간접적 영향을 미침
- 한국 현대 선불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독특한 역할 수행
함께 보기
- 한용운
- 백용성
- 만공
- 백담사
- 망월사
- 한국 근현대 불교
- 간화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