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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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름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3일 (수) 20:17 판 (명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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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별들: 일제강점기 연변에서의 독립운동

연구동기

기존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한반도나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 지역의 주요 도시 (예:하얼빈, 봉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반면, 북간도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정착하여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연구의 깊이와 범위가 충분하지 못하였다. 북간도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교육을 피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사립학교와 독립운동가 양성소가 다수 설립되었던 지역이다. 여기에서 전개된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의 교육 활동과 문화 운동은 무장투쟁의 기반을 다지는 정신적·물질적 토대였다. 또 청산리 대첩, 봉오리 전투를 비롯한 북간도 지역에서의 무장 투쟁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강력한 항전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지역 독립운동의 시작부터 발전, 그리고 이후의 시련에 이르는 전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지리적 소외로 인해 한국독립운동사에 다소 주변화되었던 북간 지역의 독립운동 실체를 다루므로써,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의 깊이를 더 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배경과 어려움

독립기지 건설 배경

일제강점기 이후 독립운동 세력은 한반도 내부에서의 활동이 극도로 제한되면서 해외에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중 북간도는 지리적·인적·정치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독립기지 건설의 핵심 공간으로 부상하였다.

첫째, 지리적 요건이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북간도는 한반도와 인접한 국경 지대이면서도 일본의 통제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한 지역이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과 넓은 평야, 밀집된 조선인 마을은 군사·정치 조직을 구축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였다. 독립군은 이 지역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었고, 지형적 이점은 일본군의 포위·색출 작전을 상대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둘째, 조선인의 대규모 이주는 독립기지 건설의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제의 토지 수탈, 기근, 정치적 불안으로 많은 조선인이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공동체적 결속을 유지하며 자치적 사회를 이루었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식량·정보를 제공하는 주요 후원층으로 기능하였다. 북간도 각지의 학교, 교회, 협동조합 등은 자연스럽게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셋째, 국제정세의 변화도 독립기지 조성을 촉진했다. 러일전쟁 이후 만주 지역은 열강의 세력 경쟁이 치열한 공간으로 변모했으며, 중국 신해혁명(1911) 이후 북간도 일대엔 비교적 느슨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틈새 속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정치·군사 활동을 전개할 여유를 확보하였다. 특히 3·1운동(1919) 이후 무장독립전의 필요성이 확대되면서 북간도는 독립군 부대 결집의 중심 무대로 자리 잡았다.

어려움과 현실

북간도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었지만, 독립기지 건설과 유지 과정은 여러 구조적 난관과 외부 압력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위협받았다.

첫째, 일본 제국의 탄압 강화가 가장 큰 장애였다. 일본은 만주 지역에서 정보망을 확대하고 경찰·헌병·간도파출소 등을 조직하여 조선인 사회를 감시했다. 특히 간도출병 이후 일본군은 북간도 일대를 직접 침범하며 독립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마을은 방화·학살·약탈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독립군은 기지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둘째, 중국 정부와 지방 군벌의 통제도 복합적 난관을 형성했다. 북간도는 중국 영토였기 때문에 독립군의 무장 활동은 정치적 민감성을 지녔다. 중국 측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조선인 무장세력을 제한하려 했고, 때로는 무장해제·추방·무기압수 등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군벌 간 권력 다툼이 심화되면서 독립군의 기지 안정성은 더욱 낮아졌다.

셋째, 자금·물자 조달의 어려움도 지속적 문제였다. 독립기지를 유지하려면 병력 양성, 무기 구입, 식량 확보 등이 필수적이었으나 해외에서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선인 동포들의 후원이 있었지만, 빈곤한 이주민 공동체의 자원만으로는 장기적 군사 활동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각 단체 간 재정 경쟁·중복 요청 등도 난맥상을 초래하였다.

넷째, 독립운동 세력 간의 노선 차이도 기지 건설을 저해했다. 북간도에는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북로군정서군 등 다양한 조직이 활동했으며, 각 조직은 군사적·정치적 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다. 통합 논의가 지속적으로 있었음에도, 지도체제나 전략 선택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여 독립기지의 단일화를 방해하였다.

다섯째, 혹독한 자연환경과 생활 기반의 취약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북간도의 혹한과 빈약한 농업 기반은 병력 유지에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독립군은 겨울철 장비 부족, 영양 결핍, 질병 등 문제에 직면하였고, 산악 지대 중심의 생활은 병력의 장기 체류에 제약을 주었다.

주요활동

간도국민회

  •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는 1910년대 후반 북간도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결성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하며 무장투쟁, 자치 행정, 민족 교육을 포괄한 총체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시킨 핵심 조직이었다. 이 단체는 수십 개의 지회를 통해 한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수호하고 민원을 처리하는 사실상의 자치 정부 역할을 수행했으며, 자체 군대인 국민군을 양성하고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군 부대에 군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보급 기지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봉오동 및 청산리 대첩의 승리에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한, 만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로 평가된다.
간도국민회 본부 사진

문화운동

서전서숙

  • 서전서숙(瑞甸書塾)은 전통적인 서당 교육에서 벗어나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등 신학문을 가르쳐 근대적 지식과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이를 통해 항일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연변 용정촌에 설립하였으며 이상설이 천주교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개수하였으며, 학교명은 서전평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고,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비록 1년 남짓밖에 운영되지 못했지만, 민족 교육의 씨앗을 뿌렸고 항일독립운동사상을 키우는 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전서숙 사진

명동학교

명동학교는 1908년 북간도 왕청현 명동촌에서 김약연이 설립한 대표적 민족교육 기관으로, 이주 조선인 사회가 자발적으로 조직한 근대 학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김약연은 북간도 조선인 공동체의 자치·교육·계몽을 중시하며 국어·역사·지리 등 민족의식 고취 과목과 근대 학문·실용 교육을 결합한 교육체계를 마련했고, 이는 명동학교를 북간도 독립운동 인재 양성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학교는 청년단·학우회 활동, 독립군 지원 등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졸업생 상당수가 이후 서로군정서군·북로군정서군 등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북간도 항일전의 주축이 되었다. 일본의 탄압과 중국 군벌의 통제로 학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명동학교와 김약연의 활동은 북간도 조선인 사회의 정체성 강화와 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명동학교 사진

무장투쟁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중국 길림성 봉오동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3.1 운동 이후 활발해진 독립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작전을 계획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홍범도(洪範圖), 안무(安武) 등이 이끈 대한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19사단 소속 부대와 교전했다. 3~4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지형적으로 불리했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봉오동 전투는 무장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본격적인 승리'라는 큰 의의를 지니며, 이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독립군은 불과 4개월 후인 10월,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에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두는 발판을 마련했다.

청산리 대첩

  •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발생했으며, 앞서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대규모 토벌 작전(간도 토벌 작전)을 시작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연합 독립군 부대가 일본 육군 제19사단과 2개 여단 등 대규모 토벌대를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전투였다. 10여 일간 이어진 이 대규모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1,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독립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이는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 대부대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규모의 승리'이자 전과가 뚜렷한 승리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역사적 의미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한반도 외곽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총체적인 항일 투쟁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깊고 다층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 망명지에서의 민족 공동체 재건과 수호의 의미

북간도는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침탈을 피해 이주한 한인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건설한 망명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국경 지대라는 특수성을 활용하여, 명동학교, 서전서숙 등 민족 교육 기관을 설립해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고 미래 세대에 독립 정신을 계승했다. 또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공동체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냈는데, 이는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한민족의 정신적 명맥을 이어가는 민족 생존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숭고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2. 독립운동의 통일적 기반 조성과 자치 역량 발휘

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개인이나 소규모 부대의 활동에 머물지 않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통일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간도국민회는 북간도 한인 사회의 사실상 자치 정부 역할을 수행하며 행정, 사법, 교육, 국방을 총괄했다. 간도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으며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의 통일성을 확보했고, 수많은 지회를 통해 한인 이주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청년들을 훈련하여 독립군을 지원하는 물적·인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독립운동이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적인 시스템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3. 무장 투쟁의 정점: 청산리 대첩 승리의 주역

북간도는 독립군의 최대 무장 투쟁 기지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가장 두드러지다. 특히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대첩은 이 지역 독립운동의 정점을 이루는데, 청산리 대첩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대승으로,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무장 항전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독립은 가능하다'는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대승은 북간도 지역 한인들의 헌신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북간도 독립운동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민족 전체의 의지가 응집된 성과로 평가된다.

4. 항일 투쟁이 겪은 시련과 역사적 교훈

북간도 독립운동의 역사는 영광뿐 아니라 처절한 시련의 기록이기도 하다. 청산리 대첩 직후 일제가 자행한 '간도참변'은 무고한 한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학교와 교회를 불태운 만행으로, 이는 북간도 한인 사회가 독립운동의 대가로 겪어야 했던 피와 희생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시련은 독립을 위한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잔인했는지를 보여주며, 후대에 독립의 가치와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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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levelId=tg_004_2150.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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