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김성일
| 김성일(金誠一) | |
|---|---|
| 성명 | 김성일 |
| 출생 | 1538 |
| 사망 | 1593년 |
| 지위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통신부사 |
개요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적 성취가 두드러져 관학과 사림 양쪽에서 주목받았으며, 1568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중앙 정치에 참여하였다.
생애
김시민은 충청남도 천안시 백전촌에서 고려의 김방경 가문을 계승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군기시에서 병기 관리와 군제 정비 업무를 담당하며 초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83년 여진 세력의 침입 사건인 니탕개의난에 참여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다. 1591년 진주판관으로 부임한 그는 지역 치안과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진주목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진주성 방어 준비를 주도하고 병력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약 3,800명의 병력으로 성을 방어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도 지휘를 계속했으며, 전투 직후 부상 악화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시민은 조선의 대표적인 방어전 영웅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