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호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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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호조사
| 성격 | 한·중 민간 독립운동 협력 단체 |
|---|---|
| 설립 시기 | 1921년 1월경 |
| 설립 지역 | 상하이(總사) · 창사 · 한커우 · 안후이 · 충칭 · 윈난 등 |
| 주요 구성 | 한국 독립운동가 · 중국 혁명·지식인 세력 |
| 목적 | 한중 친선, 한국 독립 지원, 반제국주의 공동 투쟁 |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는 1921년 상하이를 중심으로 창사(長沙), 한커우(漢口), 안후이(安徽), 충칭(重慶), 윈난(雲南) 등지에서 조직된 한·중 민간 독립운동 협력 단체이다. 이 단체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혁명·지식인 세력이 함께 결성한 항일·반제국주의 연대 조직으로, 한·중 양국의 민간 친선을 강화하고 한국 독립운동을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원하며, 동아시아 차원의 반제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한중호조사는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상하이와 남중국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고 중국 혁명세력과의 협력을 제도화한 최초의 민간 연대 조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1. 설립 배경과 결성 과정
1.1 3·1운동 이후의 한·중 연대 필요성
1919년 3·1운동 이후 다수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와 베이징, 남중국 일대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혁명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국제적 지지와 지원을 확보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같은 시기 중국 각지에서도 반제국주의·민족해방 운동이 확산되면서, 한국과 중국은 공통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협력의 필요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독립운동가와 중국 지식인·혁명가들은 양국 민간 차원의 상설 협력기구를 만들고자 하였고, 그 결과로 탄생한 조직이 한중호조사이다.
1.2 상하이 총사와 지방 분회
한중호조사는 상하이에 총사(總社)를 두고, 창사·한커우·안후이·충칭·윈난 등지에 분회를 설치하는 형태로 조직되었다. 상하이 총사는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국제도시라는 점을 활용하여 외교·선전·재정 조달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고, 각 지방 분회는 지역 상황에 맞추어 항일 여론 형성, 독립운동가 지원, 중국인 사회와의 연계를 수행하였다.
설립과 운영에는 한국 측에서 이기창(李基彰), 이우민(李愚珉), 조중구(趙重九), 황영희(黃永熙)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김규식, 여운형 등 임시정부 인사들도 외교·연락 창구로서 깊이 관여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계열 인사들을 비롯한 혁명·지식인 그룹이 비공식적으로 지원하며, 한·중 연대의 실질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2. 조직 구조와 구성원
2.1 조직 체계
한중호조사는 총사와 분회 체제 아래 여러 실무 부서를 두고 활동하였다.
- 선전부 : 항일 격문·성명 작성, 신문·잡지 기고, 각종 인쇄물 제작과 배포를 담당
- 통신부 : 한·중 양국 및 지역 분회 간의 연락, 정보 교환, 문서 왕래를 담당
- 경제부 : 독립운동 자금 모집, 후원자 네트워크 관리, 연예회·강연회 등 모금 행사 주관
- 조사부 :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정책과 동아시아 정세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향을 연구·제시
이러한 구조를 통해 한중호조사는 단순한 친목 모임 수준을 넘어, 비교적 체계적인 항일·독립운동 협력 기구로 기능하였다.
2.2 주요 인물
한중호조사에는 한국과 중국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한국 측의 경우 김홍서(金弘敍), 김규식, 이탁(李鐸), 여운형, 조동호(趙東鎬), 김문숙(金文淑), 한진교(韓鎭敎), 윤현진(尹顯振), 서병호(徐丙浩), 김철(金澈) 등이 회원·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활동한 조남승, 신규식 등도 한중호조사 인맥과 긴밀히 협력하며 한·중 연대를 확장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국민당·공산당계 혁명가들과 신문화운동에 참여하던 지식인들이 한중호조사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한중호조사를 매개로 한국 문제를 중국 사회에 소개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담론을 함께 형성하였다.
3. 주요 활동
3.1 독립운동가 지원과 상호부조
한중호조사의 1차적인 역할은 중국 각지로 망명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거주지와 생활비, 활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전한 연락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상하이와 창사, 한커우 등지의 분회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를 알선하고, 병원·학교·인쇄소 등 현지 인프라와 연계하여 활동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중국 측 회원들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경찰·군벌의 감시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실질적인 상호부조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임시정부와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중국 대륙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배후 기반이 되었다.
3.2 항일 선전과 반제국주의 공동전선
한중호조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정책과 식민 통치를 규탄하는 성명과 격문을 발표하고, 중국 각지의 민중과 언론을 상대로 적극적인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3·1운동의 의미를 알리며, 한·중이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특히 상하이·창사 등지에서는 연설회·강연회·연예회를 열어 한국의 독립 상황을 소개하고, 수익금과 후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사건 등을 소재로 한 연극이 공연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중국 민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한·중 공동의 항일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3 국제 여론전과 외교 활동
한중호조사는 중국 신문·잡지에 한국 독립운동 관련 글을 기고하고, 일본의 침략 정책과 조선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는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국제 여론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워싱턴 회의 등 국제정치 무대에서 일본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의 독립 요구를 전달하는 데에도 일정 부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김규식과 여운형 등은 중국 혁명세력과 임시정부 사이의 외교·연락 창구로서 활동하며, 한중호조사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손문(孫文)의 ‘동양평화론’과 민족자결 사상은 한중호조사 활동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고, 한국 측 인사들은 이를 적극 수용하며 동아시아 공동 해방의 비전을 공유하였다.
4. 한중호조사와 쑨원·한국 독립운동
한중호조사는 쑨원이 이끈 중국 국민혁명 세력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포함한 한국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부 자료에서는 쑨원이 중한호조사의 사장, 여운형이 부사장으로 활동했다고 전하며, 이는 한중호조사가 단지 민간 친선단체가 아니라 정치적 연대를 전제로 한 조직이었음을 보여준다.
한중호조사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쑨원의 반제국주의·민족자결 노선에 공감하며, 중국 혁명운동과 보조를 맞추는 것을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다. 반대로 중국 혁명세력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동아시아 반제 투쟁의 일부로 인식하고, 한중호조사를 매개로 한국 문제를 ‘자국의 문제’처럼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호 인식은 이후 북경한교동지회, 한국독립당, 한중문화협회 등으로 이어지는 한·중 연대의 토대가 되었다.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한중호조사는 중국 내에서 항일 세력의 신뢰를 얻은 최초의 한인 민간단체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이 단체는
-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망명·투쟁 기반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 중국 혁명·지식인 세력과의 항일 연대를 제도화하며,
- 동아시아 차원의 반제국주의 담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한중호조사의 네트워크는 이후 북경한교동지회,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 한국독립당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유일당운동과 한·중 공동 항일전선 형성의 중요한 전단계로 작용하였다. 이 점에서 한중호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가 국내 투쟁과 임시정부 중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와 동아시아 혁명 네트워크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