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도 병마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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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하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1일 (월) 16: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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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좌위장으로 삼고 동래를 구원하러 갔으나 왜적의 세력을 보고는 도망가고 말았다. 좌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도망을 거듭하다가 임진강 변에서 체포되어 군율에 따라 주살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99년(선조 32)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 곽재우(郭再祐)는 왜군이 축조한 도산성(島山城)을 활용하자는 장계를 올려 거부되자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862년(철종 13) 병마절도사 정주응(鄭周應)은 미(米)와 두(豆) 각 2,000석(石)을 자본으로 하여 환곡(還穀)을 운영하다가 농민 항쟁을 유발하였다. 정주응은 농민들이 병영으로 몰려오자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 처벌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좌위장으로 삼고 동래를 구원하러 갔으나 왜적의 세력을 보고는 도망가고 말았다. 좌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도망을 거듭하다가 임진강 변에서 체포되어 군율에 따라 주살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99년(선조 32)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 곽재우(郭再祐)는 왜군이 축조한 도산성(島山城)을 활용하자는 장계를 올려 거부되자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862년(철종 13) 병마절도사 정주응(鄭周應)은 미(米)와 두(豆) 각 2,000석(石)을 자본으로 하여 환곡(還穀)을 운영하다가 농민 항쟁을 유발하였다. 정주응은 농민들이 병영으로 몰려오자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 처벌되었다.

담당 직무

ㄱ. 종2품으로 종3품 우후(虞侯)를 거느리고, 병마절도사는 예하에 경주.안동.대구 등 거진(巨鎭) 3개소와 거진 아래의 진(鎭) 22개소를 관할
ㄴ. 1437년(세종 19) 정월에 울산이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하였을 때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울산도호부사를 겸함
ㄷ. 울산도호부가 울산군으로 환원되면서 군수가 파견되어 병마도절제사는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의 업무를 전담

변천

1416년(태종 16): 경주 안동도 병마도절제사 권만(權蔓)이 경상좌도병마절제사로 처음 임명
1417년(태종 17): 경상좌도병마사의 본영을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김
1466년(세조 12): 관제 개혁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변경되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라는 명칭이 정착 1894년(갑오개혁): 병마절도사영이 폐지됨에 따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도 폐지

의의와 평가

경상좌도병마절도사는 조선 시대 경상좌도 방어를 책임지는 육군 지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