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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ami kwon03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1월 23일 (일) 17:42 판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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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의 관계

목차

  1. 개요
  2. 총돌기
  3. 교류기
  4. 종말기

개요

조선과 청나라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조선은 장기간에 걸쳐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 정치, 군사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관계는 조선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충돌기(17세기초)

정묘호란

1623년 4월 11일,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명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숭덕제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 탓에 교역로가 끊겨 물자 부족에 심히 허덕여 이를 조선과 하는 통교를 이용하여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조선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과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정벌할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였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정벌해달라고 종용하였다. 숭덕제는 더욱 결전할 뜻을 굳히어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과 1619년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을 데리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1627년(인조 5년) 숭덕제는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3만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해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북변의 군사 체계가 붕괴된 상태였던 조선은 수세에 몰렸고 조선 조정 내에서도 화의론이 대세를 이루고 후금도 오랜 기간에 걸치는 출병이 곤란했으므로 전쟁은 지속되지 않았고 청군은 약 두 달 만에 강화조약을 하고 철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을 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3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숭덕제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

그해 5월 황제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淸), 연호를 숭덕이라 고친 청 태종 숭덕제는 조선의 도전하는 태도에 조선을 원정하려고 군을 조직할 준비를 서둘렀다. 병자호란 (1636년): 홍타이지가 청나라 황제로 즉위한 후, 조선이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조선 왕실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결국 굴복하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상징되는 을해조약 체결하였다.

병자호란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명나라 북동 지역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여진족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아이신 교로 누르하치가 숙신, 말갈, 여진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명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고 몰락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명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였다는 야사가 있으나 이는 파병된 인원의 80%가 전사한 뒤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8일(양력 1월 3일)부터 1637년 1월 30일(양력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만리장성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수십 만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교류기

종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