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eojin189

dh_edu
Iseojin189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3일 (수) 02:27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한용운의 독립운동 활동

'의친왕 복벽운동(왕정복고운동)과의 간접 연계'

의친왕 이강을 중심으로 전개된 복벽운동(王政復古運動)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하고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정치적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주로 일부 전·현직 무관 세력, 고위 관료층, 왕실 지지층,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비밀 조직 형태로 추진되었으며, 1910년대~1920년대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한용운은 직접적으로 복벽운동 조직에 가입하거나, 의친왕과 정치적 목적을 공유한 문건을 남긴 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사상·행동·당시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해본다다면, 의친왕 복벽운동과 한용운 사이에는 간접적·사상적·환경적 연계가 있었다고 설정할 수 있다.

'3.1운동'

3·1운동은 민족·종교·지식인·학생·시민이 총동원된 한국 근대 최대 규모의 비폭력 민족해방운동이었고, 한용운은 그 중심에서 사상적·실행적 핵심 인물로 작용했다. 특히 천도교·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불교계에서 유일하게 민족대표로 참여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리하면, 한용운은

1.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
2. 선언 기획과 문구 조정 과정에 기여하며,
3. 민족대표 중 행동력이 가장 강한 축에 속했고,
4. 체포 이후에도 일제 법정에서 강력한 항일 논리를 제시

그렇기에 3·1운동의 성격을 규정한 인물로 평가된다.

'불교계 독립자금 비밀 모금·지원'

3·1운동 전후 불교계에서는 비밀 독립자금 모금이 여러 경로로 이루어졌고,

한용운은 이 흐름의 중심 사상 지도자이자 조직적 연결점으로 기능했다.
직접 자금 전달의 주도자가 되었다는 공식 문서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의 위치와 활동 방식, 그리고 함께한 인물들의 역할을 고려할 때 “불교계 독립자금 네트워크 운영에 깊이 관여한 핵심적 매개자”로 평가된다.

옥중에서도 모금 네트워크를 유지하였는데, 그의 제자와 동기들이 불교계 독립자금 모금을 지속했다. 이때 운영되던 불교계 자금의 용도는 3·1운동 이후 수감자 가족 생계비, 변호비·면회비, 해외 독립운동 세력으로의 송금 등이 있는데, 이는 비밀 일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보고서에 “불교계는 조직적 모금·배포망을 유지한다”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한용운은 감옥에 있었지만, 불교계 민족파는 그를 상징적 지도자로 지정했고, 그의 사상·지시가 내부 회의에서 지속적으로 인용되었다. 즉, 직접 현금을 다루지 않았더라도 자금 모금·배분 체계는 ‘한용운 중심의 네트워크 구조’ 속에서 작동했다.

'불교 언론 및 강연을 통한 은밀한 항일·반제국주의 사상 보급'

한용운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조선불교월보》등의 불교 언론·담론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검열을 우회한 방식으로 항일 사상을 배포했다.

일제는 승려 집단을 ‘통제하기 쉬운 온건 집단’으로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일부 승려 지식인들이 불교 잡지·사찰 법회·강연회·간행물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자주적 불교관을 전파했다. 이는 독립운동의 “무장투쟁”이나 “조직 활동”과는 다른 차원의 문화·사상적 저항으로 평가된다.

한용운이 1913년~1914년에 집필한 <<조선불교유신론>>은 표면적으로는 불교 개혁서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식민지 통치 비판 + 민족 존립 전략서에 가깝다. 그의 유신론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1. 조선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외부 강압과 내부 타락 때문
2. 이를 되살리려면 자주성 회복이 필요
3. 자주성 회복은 곧 민족의 정신 회복
4. 민족 정신 회복은 압박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解放)을 전제로 함

여기서 말하는 “외부 강압”은 사실상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을 의미했다. 즉, 불교 개혁론을 빌어 ‘민족 해방’이라는 목표를 은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간회'

1920년대 후반,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치안유지법 강화·민중 탄압이 극심해지자 국내 운동세력은 기존의 분열된 세력으로는 더 이상의 항일 행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좌·우·종교·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묶는 대중적 연합단체 ‘신간회(新幹會)’이며, 그 탄생의 밑바탕에는 한용운의 결단과 조정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신간회는 보통 “여운형·장지필·안재홍 중심”으로만 소개되지만, 실제 결성 직전의 내부 기록과 기사, 참가자들의 증언 등을 보면 한용운은 결성 과정 전체를 촉발하고 중심축을 형성한 핵심 주도자였다.

1926~1927년경 독립운동 진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 민족주의 우익 계열(언론인·종교계·중간계층 지도자들), 
- 사회주의 계열(청년·노동·학생 중심의 조직들)

양쪽 모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호 불신·이념 대립 때문에 쉽사리 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용운은 세 가지 점에서 조정자이자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 불교계의 도덕적 권위자로 양 진영이 모두 부담 없이 접촉할 수 있는 인물
2.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양쪽 모두와 개인적·사상적 네트워크 존재
3. 강한 ‘대중 계몽’·‘문화운동’ 지향이 사회주의 진영에게도 신뢰를 줌

이는 신간회 결성 과정에서 ‘중립적 중재자’가 필요했던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927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각종 공동대회·강연·조직 회합에서 한용운은 반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제기했다. “독립운동의 방향을 통일해야 한다.” “대중의 힘을 모으려면 하나의 조직이 필요하다.” 언론 기록(조선일보·동아일보)과 당시 활동가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각 세력의 통일 전선 필요성’을 가장 선명하게,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인물은 한용운이었다.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이념이 다르다고 하나, 목적은 조국 자주에 있다.

그대들이 다투면, 전진할 세력이 흩어진다.
민족의 혼이 죽지 않으려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 논리는는 후에 신간회가 표방한 “정치적·경제적 민족단체의 연합”,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사항들 외에도 한용운은 다방면에서 신간회가 결성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결성 직후 고문으로 추대되며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며 신간회의 방향성도 함께 잡아주었다.

'일제 검열 회피 상징시 창작'

일제 강점기 동안 한용운은 직접적 저항 표현이 대부분 금지된 상황에서, 상징·은유·불교적 언어를 활용한 시적 암호화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특히 《님의 침묵》(1926)은 ‘님=조국’이라는 은유를 활용해 노골적 정치성을 숨기면서도 독립 의지를 전달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1. '님’이라는 보편적 호칭에 독립 메시지 은폐
: 한용운은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사랑하는 대상’, ‘부처’, ‘조국’ 등 다중적 의미를 생성하는 호명 방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검열관이 보기에는 연정시·신앙시처럼 보이지만, 조선 독자들은 이를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일깨웠다.
2. 부재·기다림·침묵의 모티프를 통한 식민현실 비판
한용운의 작품에는 대표적으로 ‘침묵’, ‘부재’, ‘기다림’이라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검열을 피할 수 있도록 연애 감정 또는 종교적 수행의 어휘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강제적 침묵(=탄압), 부재한 조국(=식민지 현실), 독립의 도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은밀한 시대 비판 기능을 지니고 있는 장치들이다.

'일제의 불교 통제정책 비판'

1930년대 이후 한용운은 일제가 조선 불교를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 사찰 운영과 승려 조직을 식민지 행정에 종속시키려 한 흐름 속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비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그의 행보는 단순한 종교개혁을 넘어, 종교·사상·문화 전반에 대한 식민 권력의 장악에 저항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성격이 강화된다. 특히 1930년대는 일제의 군국주의 강화로 조선 종교계에 대한 통제가 한층 밀도 있어진 때였고, 이에 따라 한용운의 비판 역시 기존의 이론적 개혁론을 넘어서 불교계 현실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항일적 사상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1930년대 일제는 총독부 종교과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일본 불교 종단의 지휘 체제에 편입시키려 했고, 군국주의 선전 매체로 활용하려고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은 일제가 불교를 “국가종교적 동원 기구”로 변질시키는 과정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의 정책이 사찰을 행정 하부기관으로 만들고, 승려를 군국주의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1930년대는 조선 불교의 지도부 일부가 친일적 태도를 취하거나 총독부 정책에 협력하면서 교단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시기로, 한용운은 이를 불교 본래의 자유·해탈 정신의 파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1930년대 후반 불교계는 일본식 법의(法衣) 착용 강요, 일본 종단식 의례 도입, 신사참배를 간접 강요하는 등 친일화되는 움직임이 다수 포착되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친일적 흐름을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특히 “승려가 국가주의 이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불교계 지도층이 총독부와 협력하며 ‘전통·계율·민족’을 동시에 저버렸다고 강하게 비난했고, 이는 결국 조선 불교의 자주성을 온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적 방향성과 연결되었다.

한용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오세창'

'김법린'

'백용성'

'이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