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름

dh_edu
Admin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2일 (화) 10:53 판 (간도국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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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별들: 일제강점기 연변에서의 독립운동

연구동기

기존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한반도나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 지역의 주요 도시 (예:하얼빈, 봉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반면, 북간도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정착하여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연구의 깊이와 범위가 충분하지 못하였다. 북간도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교육을 피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사립학교와 독립운동가 양성소가 다수 설립되었던 지역이다. 여기에서 전개된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의 교육 활동과 문화 운동은 무장투쟁의 기반을 다지는 정신적·물질적 토대였다. 또 청산리 대첩, 봉오리 전투를 비롯한 북간도 지역에서의 무장 투쟁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강력한 항전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지역 독립운동의 시작부터 발전, 그리고 이후의 시련에 이르는 전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지리적 소외로 인해 한국독립운동사에 다소 주변화되었던 북간 지역의 독립운동 실체를 다루므로써,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의 깊이를 더 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배경과 어려움

독립기지 건설 배경

간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해 있으므로 일제의 직접적인 통제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하고 조직을 만드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또 19세기 말부터 이주해 온 많은 조선인들이 간도에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1909년 체결된 '간도협약(圖們江中韓界務條款)'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자, 이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려움과 현실

독립운동의 자금 마련이 어려웠으며, 화폐 환전 과정에서 높은 수수료(30%~50%)로 손실이 많았다. 또 현금보다 은괴와 금 같은 실물 자산이 더 인정받는 상황에서, 군자금을 마련하거나 사용하기 위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다. 3.1운동이후 북간도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중국 당시 한인 차별정책으로 어려움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응해 조선인들은 생존과 독립운동을 위해 변복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독립운동은 안전한 환경속이 아닌,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과 적대적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중국군과 일본군의 탄압을 받으며 독립운동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주요활동

간도국민회

  •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는 1910년대 후반 북간도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결성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하며 무장투쟁, 자치 행정, 민족 교육을 포괄한 총체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시킨 핵심 조직이었다. 이 단체는 수십 개의 지회를 통해 한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수호하고 민원을 처리하는 사실상의 자치 정부 역할을 수행했으며, 자체 군대인 국민군을 양성하고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군 부대에 군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보급 기지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봉오동 및 청산리 대첩의 승리에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한, 만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로 평가된다.
파일:간도국민회 본부 사진.jpg
간도국민회 본부 사진

문화운동

서전서숙

  • 서전서숙(瑞甸書塾)은 전통적인 서당 교육에서 벗어나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등 신학문을 가르쳐 근대적 지식과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이를 통해 항일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연변 용정촌에 설립하였으며 이상설이 천주교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개수하였으며, 학교명은 서전평야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고,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비록 1년 남짓밖에 운영되지 못했지만, 민족 교육의 씨앗을 뿌렸고 항일독립운동사상을 키우는 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전서숙 사진

명동학교

  • 명동학교(明東學校)는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하여, 김약연(金躍淵)의 주도로 서전서숙을 나온 김학연(金學淵) 등 애국지사들이 1908년 4월 27일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하였다. 항일독립정신을 교육목표로 삼았고, 입학시험 및 작문시험에 반드시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토론회를 열어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명동학교 사진

무장투쟁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중국 길림성 봉오동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3.1 운동 이후 활발해진 독립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작전을 계획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홍범도(洪範圖), 안무(安武) 등이 이끈 대한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19사단 소속 부대와 교전했다. 3~4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지형적으로 불리했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봉오동 전투는 무장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본격적인 승리'라는 큰 의의를 지니며, 이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독립군은 불과 4개월 후인 10월,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에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두는 발판을 마련했다.

청산리 대첩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발생했으며, 앞서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대규모 토벌 작전(간도 토벌 작전)을 시작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연합 독립군 부대가 일본 육군 제19사단과 2개 여단 등 대규모 토벌대를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전투였다. 10여 일간 이어진 이 대규모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1,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독립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이는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 대부대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규모의 승리'이자 전과가 뚜렷한 승리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역사적 의미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한반도 외곽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총체적인 항일 투쟁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깊고 다층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 망명지에서의 민족 공동체 재건과 수호의 의미

북간도는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침탈을 피해 이주한 한인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건설한 망명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국경 지대라는 특수성을 활용하여, 명동학교, 서전서숙 등 민족 교육 기관을 설립해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고 미래 세대에 독립 정신을 계승했다. 또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공동체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냈는데, 이는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한민족의 정신적 명맥을 이어가는 민족 생존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숭고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2. 독립운동의 통일적 기반 조성과 자치 역량 발휘

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개인이나 소규모 부대의 활동에 머물지 않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통일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간도국민회는 북간도 한인 사회의 사실상 자치 정부 역할을 수행하며 행정, 사법, 교육, 국방을 총괄했다. 간도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으며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의 통일성을 확보했고, 수많은 지회를 통해 한인 이주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청년들을 훈련하여 독립군을 지원하는 물적·인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독립운동이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적인 시스템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3. 무장 투쟁의 정점: 청산리 대첩 승리의 주역

북간도는 독립군의 최대 무장 투쟁 기지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가장 두드러지다. 특히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대첩은 이 지역 독립운동의 정점을 이루는데, 청산리 대첩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대승으로,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무장 항전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독립은 가능하다'는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대승은 북간도 지역 한인들의 헌신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북간도 독립운동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민족 전체의 의지가 응집된 성과로 평가된다.

4. 항일 투쟁이 겪은 시련과 역사적 교훈

북간도 독립운동의 역사는 영광뿐 아니라 처절한 시련의 기록이기도 하다. 청산리 대첩 직후 일제가 자행한 '간도참변'은 무고한 한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학교와 교회를 불태운 만행으로, 이는 북간도 한인 사회가 독립운동의 대가로 겪어야 했던 피와 희생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시련은 독립을 위한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잔인했는지를 보여주며, 후대에 독립의 가치와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Visualization


참고문헌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levelId=tg_004_2150.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627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6837&cid=43124&categoryId=4312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14
https://ncms.nculture.org/independence-movement/story/10915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10984
https://hongbumd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