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사
개요
고려시대 태조가 개경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919년 개경에 창건한 10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단순히 종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왕실 및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종 승려 우운이 왕명으로 법왕사에 주석했다.
역사
919년(태조 2)에 태조가 개성 10사의 하나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 서긍이 진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왕성의 동북쪽의 춘궁과 멀지 않은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의 옛 터가 연경궁 동쪽에 있다고 하여 법왕사는 도성 안 동북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부터 국가적인 법회나 의례가 법왕사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목종 대에는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법왕사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법왕사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의침이 조사당을 지을 무렵 법왕사는 계단이 무너지고 초석이 파괴되어 잡초만이 무성하여 퇴락한 모습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터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건국 후 급속도로 퇴락하다 조선 전기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축제와의 관계
고려
고려시대 중동팔관회 저차 중에 국왕의 법왕사 행차가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팔관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성종이 팔관회의 잡기들이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거롭고 소란하다고 하여 모조리 폐지해 버리고 법왕사에 행차하여 분향한 뒤에 구정으로 돌아와 문무관료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행차를 마쳤다고 한다.
이규보의 법왕사 팔관설경문을 보면 중동 팔관회날 법왕사 행차에서는 고승을 초빙하여 경전 강설을 듣는 순서가 있었다. 팔관회날 국왕의 법왕사 행차는 1391년(공양왕 3) 11월까지 계속되어 고려 말까지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문화유산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