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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연구 동기
조선시대의 외교는 명·청 등 중국 왕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신의 영접과 접대 의례는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사신의 입국과 영접 절차에 집중되어 왔고, 사신의 귀국 과정에 해당하는 배웅의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비하다. 배웅 의례는 단순한 전송 행위가 아니라, 조선이 외교 관계를 마무리하는 방식이자 상대국에 대한 존중과 자주적 외교 인식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였다. 따라서 이를 고찰함으로써 조선이 대중국 관계 속에서 사대와 자주, 의례와 실리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모색했는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신 배웅에는 중앙과 지방 관청의 협조, 연회 준비, 선물 제공, 인력 동원 등 복합적인 행정·경제적 절차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의 행정 체계, 재정 운용, 물질문화의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나아가 배웅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인과 역관들의 교류는 당시 조선과 중국 간의 비공식적 무역 및 문화 교류의 현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연구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배웅 의례를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기존 외교의례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 조선 후기 외교문화사의 이해를 보다 심화하고자 한다.
칙사 접대 절차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은 일반적으로 칙사(勅使)라 불렸으며, 이들은 황제의 조서(詔書)나 칙서(勅書), 또는 예부 자문(禮部咨文)이나 요동도사 자문(遼東都司咨文) 등을 지참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중국 사신들의 주요 임무는 우선 중국 황실의 중대한 변동 사항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황제가 붕어하거나, 새 황제가 즉위하거나, 혹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또한 황태자나 황태후를 책봉하는 경우에도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이와 더불어 조선과 관련된 사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문도 있었다. 즉, 조선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거나 왕세자와 왕후의 책봉을 인준하기 위한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또한 조선 왕실 구성원에 대한 시호(諡號)나 고명(誥命)을 하달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표류인(漂流人)·도래인(渡來人)·월경인(越境人) 등의 송환 문제, 처녀 진헌, 물품 청구 등 다양한 사안으로 여러 형태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중국 사신의 일행은 주로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서반(序班), 두목(頭目), 군관(軍官), 의원(醫員), 사자관(寫字官), 주자(廚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서반은 통역을 담당하였고, 두목은 물품 운반 및 관리를 맡았는데, 두목들은 대부분 북경이나 요동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입국하면 조선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하였으며, 이러한 비공식적인 무역 활동은 조선의 산업과 상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시기에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사신의 방문이 빈번하였으나,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이후로는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나라 대신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어, 조청 관계가 새로운 외교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칙사가 파견된다는 통보를 받으면, 조정에서는 원접사(遠接使) 일행을 의주(義州)로 보구황작물내어 칙사의 입국을 환영하였다. 또한 의주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다섯 곳에는 미리 선위사(宣慰使)를 파견하여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는 예를 행하였다. 칙사가 벽제관에 도착하면 영접사(迎接使) 등이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왕은 왕세자를 비롯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영칙의(迎勅儀)’의 절차에 따라 칙사를 영접하였다. 이후 칙사를 경복궁으로 인도하여 황제의 칙서를 전달받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 태평관(太平館)에 머물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 정중히 대접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왕세자, 종친부(宗親府), 의정부 및 육조(六曹) 등 각 기관에서 차례로 연회를 마련하였다. 칙사가 귀국할 때에도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 여러 차례 전연(餞宴)을 열어 후하게 전송하였다.
정탁의 경험 중심으로
사건 배경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로써 조·명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명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으며,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해 조선에서의 군사 지원과 함께 외교적 해결 방안을 동시에 모색하였다. 만력(萬曆) 28년(1600) 5월 8일, 명 조정은 일본과의 강화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칙사(勅使)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나고야(名護屋)에서 회담을 가졌으며, 히데요시는 “내일 평화(來日和平)”라 불리는 7개 조항의 강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조건은 일본의 일방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고, 명나라와 조선이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이 무렵 일본 측 외교사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의 협상 대표인 **심유경(沈惟敬)**과 사적으로 접촉하였다. 두 사람은 전쟁의 지속이 양국 모두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짜 강화 조건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추고 강화 조건을 위조하는 외교적 조작을 감행하였다. 심유경은 히데요시가 명의 모든 요구를 수용한 것처럼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명 조정은 일본의 항복 의사가 진실하다고 오판하였다. 이러한 허위 보고를 바탕으로, 명 조정은 1596년(선조 29년) 4월, 훈위서도독첨사(勳衛署都督僉使)이자 흠차책봉일본정사(欽差冊封日本正使)로 임명된 이종성(李宗城)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의 임무는 조선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왜왕(倭王)”으로 책봉하고 명의 조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정한 의도가 항복이 아니라 조선 점령의 합법화를 꾀하는 것이었음이 드러나자, 사태는 급변하였다. 이종성은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중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고 있음을 감지하고, 끝내 일본행을 포기한 채 탈출하였다. 이 사건은 명·일 간의 강화 협상이 허위와 오판 위에 세워진 외교적 실패였음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의 재발단(정유재란, 1597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주요인물
이종성
이종성은 명나라 개국 명장 이문충(李文忠)의 장 남 이경륭(李景隆)의 후손이다. 이문충의 어머니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둘째 누나이며, 그는 뛰어난 공로로 여섯 명의 건 국 공작 중 네 번째로 서열이 높다. 주원장은 심지 어 자신의 조카가 전 원황실을 거의 일망타진했다 고 자랑스럽게 지적했다. “평장 이문충의 총병 응창은 원나라 태자를 쫓아 멀리 막북으로 도망쳐 그의 황손, 비빈, 중보를 모 두 조정에 귀속시켰고, 이 공이 가장 컸다.” -명태조 실록 권58(平章李文忠总兵应昌,逐前元太子远遁 漠北,获其皇孙、妃嫔、重宝悉归朝廷,此功最 大。—《明太祖实录卷五十八》)
정탁
풍습 활동
명과 조선의 관계
온톨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