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훈
소개
사르후 전투(萨尔浒之战) 기록 중 “都司王绍勋总管运输粮草辎重。”에서 알 수 있다싶이 “도사 왕소훈이 보급·군수 운송과 병참 물자 관리 책임자였다”
또한 명은 요동정책과 여진 관계에 있어 조선을 견제하였는데, 요동도사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왕소훈은 요동도사로서 명의 대조선 외교 창구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경계의 주체였다. 직접 중국 사신이 파견되지 않으면, 중국의 외교문서를 조선에 전달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조공 체제에서 조공국은 결국 책봉국의 문서 체계에 영향을 받아 행이 체계에 있어 왕은 요동도사로부터 공문을 접수하였다.
요동도사는 대조선 관계에서 여진정책 및 유민정책을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물품교역, 정보수집, 범월(犯越), 밀무역, 사행의 지송 등에 있어 매우 밀접한 명 관청이었다. 조선사행의 여정에 있어 요동도사는 수레의 운반 및 호송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공문의 행이 체계에서 요동도사는 조선에 명의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이 있었다.
이 중 ‘도사(都司)’는 도교 승려가 아니라,명나라의 군정·행정 지휘기관(都指揮使司/약칭 都司)을 가리킵니다. 요동 지역의 대조선 창구·의전·군정이 이 조직을 통해 집행되었고, 조선 사신단은 요동 통과 단계에서 이 기관의 관리들과 실무를 조정했습니다.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약칭 요동도사(遼東都司)는 명나라가 요동 지방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산동성에 예속되어 있었다. 1371년(홍무 4년) 7월, 원나라가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으로 설치했던 것을 정요도위(定遼都衛)로 칭했다. 1373년(홍무 6년), 요양부(遼陽府)를 설치했다. 1375년(홍무 8년) 10월, 요동도지휘사사로 이름을 바꾸고 치소를 정요중위(定遼中衛)로 삼으며 2주 25위를 거느리게 했다.
의의
요동도사는 군정합일의 운영으로 25개 위소(衛所)를 거느린 요동 지역 최고의 기관이었다. 군사·정치적 특징뿐만 아니라 각종 교역과 사행무역을 통하여 요동도사와 조선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외교문서의 전달 체계에 있으며, 조선은 요동도사를 통하여 전달받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1)위키백과
2)스토리테마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