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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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aehyun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5월 19일 (월) 12:34 판 (2. 간등의 문화적 특징과 사회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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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 간등(看燈)의 기원과 문화적 의미

신라 시대의 간등(看燈)은 한국 전통 축제인 연등회(燃燈會)의 기원으로, 불교 문화와 왕실 의례가 결합된 초기 형태의 등불 행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신라 48대 경문왕 6년(866년)과 51대 진성여왕 4년(890년)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黃龍寺)로 행차하여 등불을 구경한 것이 최초의 공식 기록이다.

1. 간등의 역사적 배경과 기록

불교 전래와 신라 왕실의 수용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 불교 의례를 국가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특히 진흥왕(재위 540~576년)은 화랑도를 조직하고 황룡사를 중심으로 불교 사상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인도와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 문화가 신라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었으며, 간등은 이러한 종교적 혼종성의 산물이었다.

2. 간등의 문화적 특징과 사회적 기능

불교 의례와 토속 신앙의 결합 간등은 불교의 등공양(燈供養) 전통과 신라의 고유 세시풍속이 혼합된 행사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정월 보름에 민간에서는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를 하며 풍년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불교적 등불 의식보다는 농경 사회의 고유 의례로, 신라 왕실이 불교와 토속 신앙을 결합해 백성의 지지를 확보하려 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왕권 강화와 사회 통합 간등은 왕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 행사’로서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왕실의 종교적 정통성 강화: 불교는 당시 초월적 권위를 가진 종교로, 왕이 사찰에서 등불 의식을 주관함으로써 ‘불법(佛法)의 수호자’ 이미지를 구축했다.

계층 간 통합: 《삼국사기》에는 신분을 막론하고 백성이 등불 행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고려 시대 연등회로 이어지며 ‘상하가 함께 즐기는 축제’로 발전한 점을 고려할 때, 신라 말기 간등도 민간의 참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의례의 상징성 등불: 어둠을 밝히는 불교의 지혜(반야)를 상징하며, 《법화경》에서는 등공양의 공덕을 강조했다.

정월 보름: 농경 사회에서 해의 길이가 늘어나는 시기로, 새해 풍년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